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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dinary 박사엄마 Dec 22. 2020

당신 잘못 아니야. 그러니까 일상을 살아.

뮤지컬 <호프>를 보고

“우리가 가진 유일한 인생은 일상이다.”


유명 작가 요제프 클라인이 남긴 미발표 원고,
자신의 삶은 돌보지 않고 그 원고만 끌어안고 사는 78세의 ‘에바 호프’.
이스라엘 도서관은 에바 호프와 수십 년째 원고 반환 소송을 진행 중이다. 그런데 이 노친네 재판에 참석도 잘하지 않을뿐더러, 어쩌다 나오면 재판과 관계없는 과거 이야기만 횡설수설 떠들어 대며 재판을 방해한다. 모두가 기피하는 “이 동네 미친년” 호프. 그녀는 자기 것도 아닌 원고를 대체 왜 그리도 놓지 못하는 것일까? 


뮤지컬 <호프>는 프란츠 카프카의 유작 반환 소송 실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위의 대사는 호프가 가진 원고를 의인화한 인물 'K'가 던진 대사인데, 작가 프란츠 카프카가 실제로 한 말로도 알려져 있다. 주옥같은 명대사들이 많았지만, 극을 보는 내내 나는 이 문장이 계속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나 또한,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어쩌면 우리 삶의 전부일 수 있음을 가슴 깊이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둘째 아이의 장애를 맞닥뜨린 후, 나는 나의 일상 따위는 마구 구겨 던져 버려야 하는 아주 하찮은 거라고 생각할 뻔했다. 

그때는 그랬다. 주위에서 보고 듣고 읽는 모든 이야기들이 "한시라도 빨리 재활하라, 답은 재활밖에 없다, 아이가 어릴수록 골든타임을 놓치지 말라, 재활에 모든 걸 걸어라..."라고 조언, 아니 강요했다. 

나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일하는 부모들, 특히 엄마의 경우, 어떻게 아이의 치료 스케줄을 감당하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런 질문을 던지면 돌아오는 것은 "그래서 저는 일을 그만뒀어요, 육아휴직 최대한으로 쓰고 퇴사했어요, 일보다 아이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와 같은 대답이었다. 

결국 모두가 나에게 "너의 일, 너의 인생, 네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으니 그만 징징거리고 네 아이 재활치료에나 올인해. 그게 네 운명이야. 네가 자초한 일이니 받아들여."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장애아이를 낳은 엄마들은 드러내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 죄책감을 안고 살아간다. 그 죄책감 때문에 아이의 재활에 더 집착하고 자신의 인생이야 어찌 됐든 아이에게 모든 일상을 저당 잡힌 채 살아가는 일이 많다.

1년만, 2년만, 아니 학교 가기 전까지... 조금만... 조금만 더 해 보자 하다 보면, 어느샌가 아이가 바로 내가 되고, 내가 아이가 된다. 아이를 뺀 자신은 자신이 아닌 것 같아서, 이제는 아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한 마디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이 원고가 바로 나야."


에바 호프는 말한다. 

이 원고가 바로 나라고. 내가 바로 이 원고이니, 원고를 빼앗아 가려면 자기를 데려가라고.

호프가 자신의 인생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고 이렇게 원고만 붙들고 사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결국 죄책감... 죄책감 때문이다.

엄마에게 맡겨진 원고, 그 원고를 지키기 위해 죽어 나간 사람들, 끝끝내 엄마조차 지키지 못한 자신. 이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아서... 그 무거운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벌주기 위해서...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인생은 돌보지 않기로 했던 것이 아닐까? 

 

다행히 나는, 일상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나를 단단하게 붙들어준 가족과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었다. 덕분에 위태위태하게나마 일상의 밸런스를 잡아가며 장애아이 엄마로서의 나와 비장애아이 엄마로서의 나, 그리고 일하는 나와 그냥 나로서 균형 있게 존재하는 중이다. 

하지만 극 중의 그녀, 에바 호프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왜 아무도 그녀에게 원고가 없어도, 그녀 인생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빛난다고 말해주지 않은 걸까? 아니 어쩌면, 누군가 말해 주었음에도 그녀 스스로 듣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다시 위의 저 문장을 끌어와서 생각해 본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인생은 일상이야. 그걸 잃어버리면...

나는 이 말을 극 중 원고가 의인화된 인물 K가 했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녀가 집착으로 끌어안고 살던 원고 K, 그는 그녀가 자신의 인생을 살기를 바랐다. 그녀에게 인생을 되찾아 주고자 끊임없이 설득한다.


"빛날 거야, 에바 호프. 이제 당신이라는 책을 써."


K는 말한다. 그녀가 이미 늙어 78세의 나이이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79세, 80세에 이르러 계속 후회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나 따위 내려놓고 그냥 당신 자신의 이야기를 쓰라고. 우리가 가진 유일한 인생은 일상이라고. 그걸 포기하면 안 된다고. 


어쩌면, 말 못 하는 우리의 장애 아이들도 엄마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그거 아닐까? 

"엄마, 나만 끌어안고 살지 말고 엄마 자신의 이야기도 써 보세요. 나를 지키기 위해 일상을 포기하지 말고 우리 같이 그냥 빛나는 인생을 살아요."라고.  


78세의 그녀도 늦지 않았으니, 우리의 이야기를 다시 쓰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

지금 놓을 수 없는 무언가를 끌어안고 함께 침몰해 가는 이가 있다면 이 극을 꼭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코로나로 극장이 문을 닫고 있어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마음을 울리는 공연 예술의 힘으로 이 모든 상황들을 헤쳐 나가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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