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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dinary 박사엄마 Feb 25. 2021

누군가의 생을 동정할 자격, 당신은 있는가?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고

"사랑해야 한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끝내 울어 버렸다. 

별거 없는 그 문장에 어쩌면 생의 비밀이 모두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프랑스 빈민가에서 창녀들의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는, 늙고 병든 이민자 여성 로자 아줌마.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고통스러운 기억을 안고 있는 그녀는 젊어서는 그 자신도 "엉덩이로 벌어먹고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90킬로의 거구가 되어 엘리베이터도 없는 7층 건물 꼭대기층을 힘겹게 오르내리며 (합법적으로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없는) 창녀들의 아이를 잠시 맡아 키워 주는 일로써 생을 유지한다. 
그런 그녀에게 맡겨져 위태롭게 자란 아랍인 아이 모하메드, 이른바 모모. 로자 아줌마와 가장 오랜동안 함께 살아왔고 그 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이기에 다른 아이들을 돌보고 뒤를 치우는 일을 거의 도맡아 한다. 모모가 사는 세상에서 가장 멋져 보이는 어른은 창녀들의 포주, 혹은 뚜쟁이이기에 그 역시 착한 포주가 되기를 꿈꾼다.  


빈민가, 창녀, 늙고 병든 여자, 홀로코스트 생존자, 뚱뚱하고 못생긴 여성, 유태인과 아랍인, 이민자, 창녀의 아이, 버려진 아이, 기껏해야 포주가 꿈인 거리의 어린아이......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쩜 이렇게 각종 악조건을 다 타고난 인생들인지, 과연 이들에게 밝은 세상을 살아갈 희망이 남아 있기는 한 것인지, 답답하고 또 답답할 노릇이다. 양지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차마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냄새나고 구질구질한 음지의 인생, 그것이 바로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인생이라며 가엾은 그들을 향해 눈물 한 방울, 동정 한 조각 던져 주는 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10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14살) 모모의 눈으로 보면, 냄새나고 구질구질한 것은 세상이지 그들 자신이 아니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했다. 늙고 병들어 정신조차 온전치 못한 추하기 그지없는 그 여자를 14살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사랑했다. 로자 아줌마 역시 모모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 너무 예뻐서, 너무 사랑해서... 자신을 일찍 떠날 것이 두려워 나이까지 속였다 하지 않았던가. 유태인인 그녀가 태생이 아랍인인 모모를 좋은 아랍인으로 성장하도록 하밀 할아버지께 보내어 교육받도록 한 것 또한 종교를 뛰어넘는 놀라운 사랑이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가 죽는 것이 가장 두렵다. 로자 아줌마는 병원에서 의사들이 자신에게 튜브를 매달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 가장 두렵다. 모모는, 자신의 두려움보다 로자 아줌마가 더 중요했다. 모모로 인해, 로자 아줌마는 두려운 결말을 맞이하지 않을 수 있었다. 모모는, 사랑하는 로자 아줌마를 지키고 또 지켰다. 


한 인간의 생의 가치는 무엇으로 잴 수 있을까? 돈으로, 지식으로, 사회적 명망으로, 업적으로... 그것을 잴 수 있을까? 세상에 부유하게 태어나 학업으로 지식을 연마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치에 나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쳐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것. 모두가 그런 인생을 살길 원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살 수는 없다. 내 경우도 일단 "세상에 부유하게 태어나"부터 실패했기 때문에 그 뒤에는 더더욱 해결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살지 못하는 우리 대부분은 가치 없는 생을 사는 걸까? 아닐 것이다. 모모와 로자 아줌마를 보라. 그때 그곳에서 그만큼의 시간 동안, 이들은 세상 누구보다도 충만하게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들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걸 만큼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그들 앞의 생이 그저 초라하고 불쌍하기만 한 것이라고, 당신은 함부로 동정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늙고 추해진 생의 마지막에, 이보다 더 사랑받을 자신이 있는가. 



책을 덮고, 얼마 전 뉴스에서 본 "우리 엄마는 몸 마비로 돌아가셨다"는 메모를 앞에 두고 노숙을 했다던 성인 발달장애인 아들이 생각났다. 장애 등록도 안 돼 있던 아들은 죽은 엄마의 시신 곁에서 몇 개월을 더 같이 살았다지. 이 기사를 마주하며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언론에서는 코로나 시대가 만든 비극이라며, 촘촘한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를 지적하고 복지 사각지대를 해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맞는 말이다.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움의 손길을 받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들이 생기지 못하도록 대책 마련이 절실한 것이 사실이다. 

뉴스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이 모자의 사연을 안타까워했고 슬퍼했고 동정했다. 발달장애인을 가족으로 둔 사람들은 더더욱 남일 같지 않아 마음 아파하며 눈물을 흘렸고, 나도 나의 둘째의 미래를 이 사연에 겹쳐 보면서 비통함을 느꼈다. 

그렇다. 정말 이 사건은 너무나 안타깝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생을 통째로 동정하지는 않으련다. 그럴 만한 자격이 나에게는 없으니까. 누가 아는가? 이 두 모자가 사는 동안 서로 진정으로 아낌없이 사랑하였기에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충만한 순간들이 연속되었는지도. 이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저 불쌍하고 불행한 인생이었을지 모르나, 세상의 잣대와 상관없이 서로를 사랑으로 부둥켜안고 인생의 한 토막을 살았다면 어쩌면 그들은 누구보다도 빛나는 인생을 가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들의 인생을 모르는 내가 함부로 가엾다 어떻다 말하면 안 될 일이다. 다만, 간절히 그 모자가 사랑으로 충만한 인생이었기를 빌어 본다. 


남의 인생을 함부로 예단하고 동정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당신이 가엾어하는 이들보다 진정으로 사랑받고 사랑하는 인생을 살고 있느냐고. 생의 마지막에 당신을 사랑하는 누군가가 당신을 끝까지 지킬 거라고 자신하느냐고.  


"사랑해야 한다." 

우리 앞의 생이 때로는 내게 지나치게 불친절할지라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고 사랑받았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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