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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 Jan 06. 2021

노숙자의 편안한 미소

일본 도쿄 여행기

 15년 봄이었다. 당시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따뜻한 바람이 조금씩 불어오며 나뭇가지에 꽃망울이 하나둘씩 터지는 것을 보고 있으니, 군 복무 전 일본 여행에서 본 봄 벚꽃을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에 즉흥적으로 여행을 준비하게 되었다. 예전에 갔던 오사카/교토 지역이 아닌 어렸을 때부터 가 보고 싶었던 도쿄로 여행지를 정하고, 봄 벚꽃을 보기 위해 예상 개화시기에 맞춰 비행기 표를 끊었다. 이 휴학이 끝나면 아무 걱정 없이 자유롭게 여행하는 것도 더 이상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나름 비장한 각오로 여행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 계획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비행기가 착륙하기 위해 도쿄 상공에서 방향을 바꿀 때였다. 착륙이 가까워지면서 만개했어야 할 창밖 도쿄 시내의 벚꽃이 생각보다 많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막상 공항에 내리니 예상치 못한 추위가 바람과 함께 나를 격하게 반겨주었다. 머릿속에 벚꽃이 만개한 도쿄를 생각하고 왔기 때문에 당연히 날씨가 따뜻할 줄 알고 얇은 옷 위주로 가져와서 적잖이 당황했다. 숙소로 가는 도중 지하철 창밖을 봐도, 거리를 걸어도 벚꽃이 생각보다 많이 안 보이고. 이상한 점이 많아 그날 숙소에 들어가 여행 계획을 다시 확인해보니, 기합이 너무 지나치게 들어갔나 본지 머릿속에 오로지 만개만을 생각하고 개화시기를 만개시기로 잘못 이해해서 개화시기에 여행을 와 버린 것이었다.

 첫날은 추운 날씨 때문에 제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만개한 벚꽃을 볼 수 없다는 실망감에 숙소에 일찍 들어와 쉬었다. 둘째 날 그래도 의욕을 내어 따뜻하게 입을 옷을 구입했으나, 이미 감기에 걸려 관광명소를 둘러봐도 여행을 다닌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 셋째 날 날씨가 따뜻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비록 바람이 불면 쌀쌀한 느낌이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이전 날들에 비해 확실히 봄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날씨가 온화해졌다. 누그러진 날씨에 내 마음도 약간의 활기를 얻어 우에노 공원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날씨가 따뜻해져서 그런지 공원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처럼 산책하는 사람들, 돗자리를 펴고 꽃구경하며 음식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 이것저것 생필품을 늘어놓고 팔고 있는 만물상, 피에로 분장을 한 예술가가 링으로 거리공연하는 모습, 호숫가 위에는 오리배를 타고 유유자적 놀고 있는 모습들이 평화롭게 보였다. 내가 보고 싶어 하던 만개한 벚나무도 있었다. 이제 막 꽃망울을 맺은 다른 나무들과는 달리 정말 탐스럽게 벚꽃이 피어있었는데, 여러 방송사의 아나운서와 카메라맨이 앞다퉈 그 모습을 TV에 담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이런 평화로운 광경들을 다 제치고 지금까지 내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는 것은 공원 연못가 벤치에 누워있던 노숙자이다. 그 노숙자가 한때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신림동 꽃거지처럼 잘생겨서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그냥 평범한 노숙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눈길이 갔던 이유를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이 입고 있는 다 헤진 외투가 여행 첫날 내가 입었던 옷처럼 추위를 막아주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동질감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그 노숙자는 입고 있는 낡은 옷으로는 추위를 견디기 힘들었나 본지 몇 겹 안 되는 신문지로 몸을 덮고 있었다. 중학교 수업시간에 노숙생활을 경험하셨던 선생님께 신문지 한 장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크다는 걸 들었기 때문에 추운 날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숙자를 보고 든 내 생각은 딱 여기까지였다. 보통 노숙자는 냄새가 나니까, 그런 거부감에 선뜻 가까이 도와주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주변 사람들도 크게 신경 쓰고 있지 않았고, 우리나라에서도 도와주고 싶다면 동전으로 적선할 뿐 적극적으로 도와주지도 않는데 굳이 다른 나라에까지 와서 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불과 몇 분 뒤 내 생각 크게 바뀌었다. 유유자적하게 호수를 바라보며 쉬는 중, 구름이 일부 걷혔나 본지 햇빛이 더 따사롭게 비쳤다. 호수의 오리배를 탄 사람들, 산책하는 사람들, 공연하는 사람들 모두 날씨가 좋아지니 얼굴에서 웃음이 번졌다. 특히 내가 봤던 그 노숙자는 마치 전역날의 내 얼굴처럼 너무나도 편안해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날의 햇빛은 적어도 그 사람한테 만큼 그 며칠간의 육체적인 추움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힘듦도 녹여줄 만큼 따뜻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 표정을 보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 햇빛 같은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처음 노숙자를 보고 더럽다고 생각해 마음속으로 무의식적인 거부부터 했다. 그에 반해 공원의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무의식적으로 긍정부터 했다. 하지만 햇빛은 사람, 동물, 식물, 깨끗한 것, 더러운 것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분별하지 않고 똑같이 따뜻하게 비춰 주었다. 사람과 같이 조건에 따라 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똑같이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차별 없이 사람을 똑같이 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실제로 그것이 가능한지 군 복무 시절부터 고민해 왔는데, 이 순간을 통해 대답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모습이 사람이라면 궁극적으로 향해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해 항상 마음속 이정표로 삼고 있다.







 이번 여행기를 통해 평등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께서 보실 때, 마지막 부분에 제 공부의 부족한 점이 보일 것 같아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약간의 첨언을 하자면, 제가 전달하고 싶은 평등이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다시 말해 임의적인 분별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말하는 ‘더러움’이나 ‘깨끗함’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장 저희 집 냉장고를 보면 더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겉으로 보이는 더러움 혹은 깨끗함의 개념은 당연히 있습니다. 이런 걸 부정하면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분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러움은 더러움 그대로, 깨끗함은 깨끗함 그로 보되, 더럽기 때문에 어떤 건 안 하고 깨끗하기 때문에 이런 건 한다의 인위적, 임의적인 구분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비유를 들자면, 내가 사장인 음식점에서 국수 한 그릇 값을 내는 사람이면 부자이던, 가난한 사람이던 똑같은 손님인 것과 같습니다. 부자 손님이라고 더 잘할 필요 없고, 가난한 손님이라고 홀대할 필요 없이 손님은 그저 손님인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 관심 있으신 분들은 아래의 키워드를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분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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