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면도를 했다. 나 같은 경우는 얼굴에 수염이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있는 수염도 조금 자라나면 그때그때 족집게로 뽑기 때문에 면도를 자주 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면도를 하고 싶은 날이 있다. 면도를 하고 싶은 이유는 다양하지만, 오늘은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비우고 싶었다.
내가 쓰는 면도날은 흔히 TV에서 광고하는 나온 다중날이 아닌, 면도날을 갈아 끼우는 클래식 면도기이다. 클래식 면도기는 효율성과는 거리가 있다. 속도는 느리고, 자칫하다 얼굴이나 손에 상처 입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이유는, 면도하는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중이라는 것은 별 것 없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면도하는 것 그 자체에만 집중할 뿐, 그 밖의 다른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얼굴을 따뜻한 물로 씻고, 거울을 바라보며 까슬하게 자란 수염에 비누 거품을 내고, 볼에 바람을 넣어 피부를 늘려가며 수염을 잘라나간다. 수염 때문에 까슬하게 느껴졌던 피부표면이 부드럽게 느껴지면 내 마음도 함께 편안해진다.
이렇게 편안한 면도가 몇 차례 반복되면 집중이 흩어져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 바로 얼굴이나 손에 상처를 입는다. 칼날의 각도가 흐트러지면서 기다란 상처가 얼굴과 손에 남는다. 상처에서 느껴지는 따끔거림은 마치 선사(禪師)가 내 마음의 산란함을 귀신같이 알아차려, 정신 차리라고 죽비로 한대 후려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집중의 편안함과, 이로부터 생기는 산란함. 어쩌면 면도란 이 편안함과 산란함의 줄다리기 속에서 중심을 잡는 생활 속 수행 일 지도 모른다.
면도 후엔 피부를 안정시키기 위해 명반을 바른다. SNS 바버샵 쇼츠 영상에서 면도 후 얼음을 바르는 모습을 봤는데, 나중에 그것이 얼음이 아닌 명반인 것을 알게 되어 호기심에 구입 후 사용하고 있다.
면도가 끝난 후 명반을 바른 자리는 따끔따끔하다. 그리고 이전에 해 봐서 이미 알고 있지만, 손가락에도 명반을 발라 그 짜면서도 텁텁한 맛을 본다. 평소 별생각 없이 반복하는 행위들이지만, 생각해 보면 피부의 따끔함과 혀로 맛보는 짜고 텁텁한 맛을 통해 뭔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가장 직접적으로 느끼게 되어 반복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