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 일기>>와 <<한 말씀만 하소서>>
우리의 반려견은 아마도 개 공장에서 태어나 펫숍에 팔렸을 것이다. 지인이 키우던 강아지를 엄마가 데려왔을 때, 강아지가 ‘진짜’ 어디서 왔는지 물어봐야 한다고는 가족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벌써 14년 전 일이고, 반려견이 한 살도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강아지의 원래 주인은 출산일이 가까워지자 엄마에게 강아지를 ‘맡겼고’ 강아지는 그대로 우리의 반려견이 되었다.
반려견이 죽고 난 뒤 우리 가족은 반려견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이야기의 퍼즐을 맞추었다.
"엄마, 그 사람은 왜 엄마한테 다시 연락을 안 했을까?”
“그 사람은 강아지를 우리에게 넘긴 거야.”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아이를 낳을 때가 되니 강아지를 키우는 일이 부담됐을 거라고. 마침 엄마는 강아지를 ‘원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막냇동생이 집에 혼자 있는 게 마음에 걸렸는데 강아지라도 있으면 덜 무섭고 덜 외로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반려견이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대학생이 된 후로는 기숙사에 살며 한 달에 한두 번 강아지가 있는 본가에 내려갔다. 내가 문 앞에 서서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면 강아지 발톱이 장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먼저 났다. 문간에 서서 쓰다듬을 때마다 강아지는 오줌을 쌌다. 나중에는 나를 볼 때마다 그런 행동을 반복했는데, 습관을 고쳐주려고 반응을 하지 않거나 문만 열고 바로 들어가지 않기도 했지만 강아지는 그 일을 드물게 반복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원 생활을 하면서 본가로 내려가는 일은 더 드물어졌다. 해외에 나갔다 3년 만에 귀국했을 때, 반려견은 나를 기억한다는 듯 꼬리를 흔들며 반응했지만 예전만큼 흥분하지 않았고 오줌을 싸지도 않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주변 일에 무심해지는 것처럼, 동물도 나이를 먹을수록 절대적인 기쁨의 강도나 역치가 줄어드는지 궁금했다. 하루 종일 몸을 둥글게 말고 엎드려 있는 건 몸이 힘들어서인지, 세상이 재미없어서인지. 뭔가 알았다면 더 잘해줄 수 있었을까.
2020년에 한국에 머문 기간 대부분을 반려견에게 썼다. 내 일상이 반려견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좋았다. 아침이면 하루의 날씨를 확인해 산책 가기 좋은 시간대를 고르고, 잠깐 외출할 때에도 함께 나갔다. 내 스케줄을 뒤로 미뤄가며 가장 빠른 날짜로 동물 병원을 예약하고, 반려견 동반이 가능한 카페를 찾아다녔다. 평생을 기다림으로 채웠을 반려견을 위해, 이제 내가 반려견을 기다리고 바라보며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반려견은 눈 뜬 대부분의 시간을 웅크린 채로 보냈다. 아껴주지 못했던 시간을 벌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반려견은 이미 늙어버렸고, 나에게 겨우 7개월 남짓한 시간을 더 허락한 뒤 떠났다.
누군가는 장례식장에 조문을 가는 횟수가 잦아질 때 어른이 되고 있음을 실감한다고 했다. 이별의 순간을 무던하게 받아들일 때 비애를 느낀다고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통은 서서히 조용해졌다. 울고 싶은 순간은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반려견은 약 14년 동안 우리 가족과 함께 했지만, 거기에 내가 포함된 시간은 절반도 못 된다. 나는 반려견을 내 가족으로 생각하지만 반려견은 나를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친척 정도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영영 떠난 줄 알았던 사람이 갑자기 매일 곁에 머물며 자신의 마지막까지 함께 하게 될 거란 걸 알았을까. 나는 몰랐던 반려견의 마지막을, 반려견은 내심 눈치채고 있었을까. 반려견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제 와서 친한 척한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나의 무심했던 과거를 만회할 수 있게 마음을 열어주었을까. 물어볼 수 있었다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반려견을 보내고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와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를 읽었다. 각각 어머니와 아들을 잃은 뒤 쓴 글들의 모음이다. 롤랑 바르트는 그 기록을 책으로 낼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박완서의 글은 잡지에 연재되기는 했지만 “소설도 수필도 아닌 일기” 형식을 띠고 있다. 그들이 적은 글이 독자를 상정하지 않은 개인적인 기록임을 의미한다. 책을 읽으면서 위로받는 일이 가능할까 의심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경험을 공유하며 위로받는 일이 부도덕한 일 같기도 해 괴로웠다. 이 슬픔은 당연한 거야, 생각하면서도 내가 괴로워해도 될까 하는 생각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슬픔에도 자격이 있을까, 그렇다면 얼마큼 사랑해야 슬프다고 말할 수 있을까.
롤랑 바르트는 종이에 십자를 그려 네 칸을 만든 뒤 그때그때 떠오르는 고통을 종이에 적었다. 나도 그를 따라 손바닥 만한 노트를 사서 십자를 긋고 벼락처럼 떨어지는 슬픔을 적었다. 반려견과 산책할 때마다 지나치던 길을 혼자 걷다가, 동물 병원이 보이지 않는 길로 돌아가다가, 정리하지 못한 반려견의 흔적들을 집안 곳곳에서 마주할 때마다, 길가에 홀로 선 채로 적었다. 어떤 날엔 행복했던 순간들을 적었다. 날씨 좋은 날의 산책, 반려견의 시선을 따라가며 즐겼던 봄꽃들, 더운 날 선풍기 앞에 나란히 누워 있었던 우리를.
그렇게 생각나는 대로 마구 적어내는 동안, 반려견과 말이 통한 적은 없었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말보다 고요하고 애틋한 방식으로. 우리 가족이 각자의 방식대로 반려견을 사랑한 것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작은 생명은 열심히 살고 버티며 우리에게 생 전부를 주었다. 그 유대만큼은 누구의 확인을 받을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순간이 있다. 누가 나의 어깨를 필요로 하는지, 누가 나의 포옹을 편안해하는지, 누가 나의 곁을 원하는지. 반려견은 볕이 잘 드는 곳의 방석을 마다하고 내 허벅지 위로 올라와 잠을 잤다. 내가 엎드려 책을 읽고 있으면 이불 아래를 파고들며 옆을 찾았다. 반려견은 늘 이야기하고 있었다. 말 대신 체온과 시간으로, 그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는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온기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끼면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한 밤에야 마음껏 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