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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시 Oct 23. 2021

나는 부드럽고 싶지 않아

<<아무튼, 비건>>

채식 지향을 시작한 후로 종종 채식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뭐였냐는 질문을 받는다. 어떤 책을 읽으면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와 함께. 그럴 때 내가 추천하는 책은 보선 작가의 『나의 비거니즘 만화』다. 만화라 어렵지도 않고, 따뜻한 그림체와 상냥한 어투 덕에 비거니즘을 부담 없이 받아들이기 좋다. 이 책은 비거니즘을 동물 착취에 반대하는 삶의 철학으로 소개한다. 비거니즘을 어렵게 이해할 필요가 없으며, 완전한 비건이 아닌 불완전한 비건으로 생활하는 데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남들에게 『나의 비거니즘 만화』 한 권만 추천할 때면 스스로를 속이는 기분이 든다. 책 『아무튼, 비건』덕분에 비거니즘을 결심하게 됐지만 이 책을 다른 사람에게 쉽게 추천하지 못했고, 왜 추천하지 못했는지도 잘 알고 있다. 이 책은 육식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잘못하고 있다’고 열심히 호통을 친다. 비거니즘에 막 관심을 갖기 시작한 사람이 읽었다 ‘뭔데 이 사람은 이렇게 말을 하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하고 마음 상하기 딱 좋은 책이다. 나도 그 책을 읽을 때까진 비건이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이 책이 좋았다. 그런 단호한 말투마저도.



코로나가 발생한 후 비행기를 타고 호주로 갔을 때 공항에는 승객보다 경찰, 군인, 의사와 간호사가 훨씬 더 많았다. 평소보다 두세 배는 더 삼엄한 입국심사를 거쳐 겨우 공항을 빠져나간 뒤에도 자유의 몸이 될 수 없었고, 시드니에 있는 호텔에 2주 동안 머물며 격리해야 했다. 매일 오전에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 몸 상태가 어떤지 보고하는 일이 해야 할 일의 전부였고, 나는 방 안에 갇힌 채 책을 읽고 일기를 쓰거나 밖을 내다보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하루 세 끼는 매일 정해진 시각에 문 앞에 왔다. 아침엔 주로 한 번 먹을 분량의 버터와 잼 한두 종류를 포함한 빵이, 점심과 저녁엔 커리나 면 종류의 음식에 더해 푸딩이나 미니 케이크가 따로 포장돼 배달됐다. 매 끼니마다 비닐로 포장된 일회용 커트러리가 같이 왔다. 짝꿍은 일주일에 한 번 호텔을 찾아 내가 먹고 싶어 한 과자와 음료, 입맛에 안 맞는 음식이 나왔을 때 대신 먹을 수 있는 수프와 컵라면을 리셉션에 맡기고 갔다. 짝꿍이 같이 가져다준 젓가락을 씻어 쓰면서 일회용품 사용을 줄였고, 식사를 끝낸 후엔 플라스틱 용기를 깨끗하게 설거지해 분리수거를 했다. 그럼에도 쓰레기는 하루가 다르게 쌓여갔다. 내 입으로 들어가지 않는 모든 것들 전부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집에서 생활할 때는 쓰레기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 줄 몰랐다. 집에는 늘 사람이 여러 명 있었고, 재활용품은 쌓아 두기보다 나갈 때마다 분리수거장에 들러 버렸던 터라 재활용 쓰레기를 쌓아두고 확인한 적이 없었다. 격리라는 특수한 경우 때문에 플라스틱 덜 사용하기를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마음의 가책이 덜하진 않았다. 


그즈음 나는 기후위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었다. 플라스틱 통에 든 샴푸 대신 고체 비누를 쓰거나 몇 번 쓰고 말 물건은 사지 않는 쪽으로 습관을 고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커다란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을 놓을 수가 없었다. 육식을 끊고 채식주의자가 되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라는 진실. 더 잘해보려는 노력 없이, 할 수 있는 일만 하면서 마음 편하려고 했다는 진실.



비건이 되는 일이 기후 위기를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걸 알았지만 내가 비건이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다이어트에 성공해본 적이 없는 내가 비건이 된다고? 비건이 되는 일은 다이어트에 성공하는 일보다 더 어려워 보였다. 그런 나를 위한 문장이 책에 있었다. 


진짜 변화는 우리 모두가 평소에 하는 수준보다 한 뼘 더 해보려고 노력할 때 일어난다.


그는 그렇게 단호히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하는 정도로는 바뀔 수 없는 게 당연한 거야, 변화에는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으니까. 나는 벼락같은 한 문장을 읽으며 호텔방에서 비건이 되기로 결심했다.



내가 비건이 되는 일만큼 짝꿍이 비건이 되는 일도 쉽지는 않았다. 내가 비건이 되는 일은 식단에 완전한 변화가 있을 거라는 선언과도 같았다. 좋아하는 것만 먹는 나의 식습관 탓에 나와 짝꿍이 먹는 음식들은 대부분 내 입맛에 맞춘 음식이었는데 내가 비건이 되면 우리는 더욱더 한정된 음식만 먹게 될 터였다. 짝꿍은 내 결심을 말릴 생각은 없지만, 자신은 계속 육식을 하겠다고 했다. 


짝꿍의 의견을 수용할 경우, 식탁엔 계속 고기가 올라오게 된다. 그런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육식을 할 권리와 육식을 안 할 권리 모두 유지하고, 한쪽이 잘못됐다고 말할 필요 없는, 서로 마음 상할 일 없는 결론. 나는 그런 결론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를 절대 만날 수 없는 평행선 위에 올려두고 싶지 않았다. 그건 다툼을 유예하는 일이었고 불편한 일을 먼 구석에 치워버리는 일과 같았다. 나는 싸우게 되더라도 의견을 맞추어나가자고 말했다. 이해라는 말로 불화를 포장한 채 그냥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그때부터 우리는 함께 비건을 공부했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보선의 『나의 비거니즘 만화』를 읽었다. 비건의 유형을 확인하고, 우리가 어떤 비건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우리는 현재 페스코 베지터리언*을 지향하는 플렉시테리언**으로 산다. 평일에는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고, 주말에 고기를 먹거나 지인과의 식사 자리에 참석한다. 비건 치즈를 주로 먹지만 가끔 일반 치즈도 먹고, 우유 대신 두유를 구입해 마신다. 자신과의 약속을 못 지킬 때도 있지만, 이전보다 더 자주 채식을 하며 살고 있다. 


*페스코 베지터리언: 육류는 먹지 않되 생선, 동물의 알, 유제품은 먹는 채식 유형

**플렉시테리언: 채식을 주로 하되 때에 따라 육류, 해산물을 먹는 채식 유형


누군가가 ‘플렉시테리언’은 허울뿐인, 자기 마음 편하자고 사용하는 말이라고 했다. 내가 플렉시테리언이 되어보니 알겠다. 스스로를 ‘잡식주의자’나 ‘육식주의자’로 칭하는 것과 ‘플렉시테리언’으로 칭하는 것 사이엔 깊은 강이 흐른다. 나는 평생을 육식에 기울어진 식탁 위에서 살았다. 시금치나물도 먹고 콩나물국도 좋아하지만 채소 반찬과 국은 어디까지나 곁들여 먹는 음식일 뿐, 식탁 가운데에는 불고기나 제육볶음이 있어야 했다. 플렉시테리언으로 살겠다는 말은 내가 다른 사람이 될 거란 선언에 가깝다. 식탁 위에 올리는 채식 가짓수를 늘리고 고기 먹는 횟수를 줄이겠다는 결심이자 삶에 변화를 주겠다는 다짐이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너 하나 애써봤자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나 혼자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 하면 더더욱 비건을 포기할 수 없어진다. 비건이 나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모두에게도 필요한 일이라고 말하고 싶어 진다. 비건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비건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비건을 하든 말든 상관없지만 나한테 강요하지는 마라. 나에게도 육식을 할 권리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권리란 대체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평행선 위에 서서 서로의 권리를 지키는 것만이 갈등의 유일한 해결책일까? 날카로운 말을 듣다 보면 그 사람들은 비건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비건을 싫어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비건만 이런 이야기를 듣는 건 아니다. 성소수자들이 목소리를 높일 때도 반대편 평행선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니들이 누굴 좋아하든 상관없지만 내 눈에 띄지는 마라’. 같은 이유로 ‘여자는 집에서 애나 보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장애인은 집에만 있어’야만 한다. 소수자들의 권리는 다수자들의 일상을 깨지 않을 때에만 가질 수 있는, 타인의 인정 아래서만 가능한 그늘 속 평화에 불과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다 보니 내 목소리를 줄이고 부드럽게 말하는 데 익숙해졌다. 물론 부드러움에도 힘이 있다. “부드러움은 강함을 이긴다”는 말이 있듯,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것도 차가운 폭풍이 아니라 따뜻한 햇살이었다. 하지만 ‘부드러움’의 뜻을 떠올리면 살면서 모난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려 나를 필요 이상으로 다듬었던 날들이 생각난다. 부드러움의 미덕은 부드러움을 선택할 수 있을 때에나 의미가 있다. 부드러워야만 했던 삶 속에서 나는 강요받은 미소와 침묵을 오래 배웠다. 나는 이제 억지로 웃지 않는 법을, 침묵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있다.


『아무튼, 비건』을 짝꿍에게 끝내 추천하지 못했다. 비건을 공부하던 초반에는 주저함이 있었고, 비건을 시작한 다음에는 굳이 추천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이 책을 읽으면 짝꿍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다. 당연한 말이라면서 고개를 끄덕일까. 


이 책을 읽게 될 논비건들의 반응도 궁금하다. 『아무튼, 비건』을 읽고 비건을 결심하게 될 수도 있고, 비건에서 더 멀어지게 될 수도 있다. 비건을 부드럽게 권하는 책은 많다. 온건한 변화부터 시작하자고 말하는 책도 많다. 하지만 비건과 관련해 책 한 권을 골라야 한다면 이 책을 고르고 싶다. 책만큼이나 작가의 단호한 말투 역시 좋아하기 때문에, 나 역시 더 이상 부드럽고 싶지 않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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