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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시 Oct 18. 2021

나는 초라한 나로도 족했다

<<아무튼, 메모>>


세상은 넓고 읽어야 할 책은 많다. 누가 내게 책을 읽으라고 협박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늘 초조한 마음으로 인터넷 서점을 둘러보고 신간을 확인한다. 메모장에도, 장바구니에도, 읽어야 할 책이 넘쳐난다. 매일 새 책을 읽어도 시간이 모자라건만, 때가 되면 한 번씩 꺼내 읽는 책이 있다. 내가 아무 때고 꺼내 읽는 바람에 <<아무튼, 메모>>는 원래 있어야 할 책장이 아닌 곳에서 더 자주 발견된다. 책상 위에서, 서랍 안에서, 식탁 위에서, 가방 안에서, 베개 밑에서, 가끔은 벽과 침대 사이에서도.



좋은 책은 책으로만 남지 않는다. 좋은 이야기는 고여 있지 않는다. 물처럼 흐르고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독자의 마음을 간질이고 끝내 움직이게 만든다. 책을 읽을 때마다 책 속 문장들이 내게 말을 건다. 읽을 때마다 매번 다른 문장이. 


어떤 날에는 “메모같이 사소한 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p.41)라는 문장에서 책 읽기를 멈춘다. 작가가 “강아지가 꼬리만 흔들어도 웃을 수 있지 않냐”(p.41)고 한 말을 곱씹으며, 나의 사소한 일을 떠올린다. 생각 없이 올려다본 하늘이 예쁠 때, 고양이 한 마리가 볕이 잘 드는 인도를 떡하니 차지하고 앉아 나를 보고 있을 때, 언덕에 앉아서 바라본 노을이 예뻐서 울고 싶어질 때, 예전 같았다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 데서 그쳤겠지만 요즘엔 사진도 찍고 메모 한 줄을 더 남긴다. 발 끝까지 밀려왔다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잔물결 같은 일상이 쉽사리 도망가지 않기를 바라면서. 아주 작은 일도 적는 순간 의미가 생긴다.


어떤 날에는 “나의 분투는 아직까지는 미완이고 결점이 많고 한계는 명백하고 실망스러운 실패로 얼룩져 있고 그런 노력을 했다는 것조차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냥 나의 노트들에 혼란스러운 흔적들로만 남아 있다”(p.70)는 부분에서 읽기를 멈춘다. 이런 글을 읽으면 책을 덮고 나의 메모를 찾아 읽어야만 한다. 행간 사이에서, 쉼표와 마침표에서 한 번씩 읽기를 멈추면서 나의 ‘분투’를 확인한다. 내가 때때로 적었던 단어들과 의미 없이 써 내려간 문장들이 나의 노력이 되고, 삶을 살아낸 증거가 된다. 



* 100

20이나 40을 가지고 있어도, 100이 아니면 의미 없어 보이던 시기가 있었다. 매일의 노력은 너무 작아 하찮고, 나의 발전은 더디고, 내가 바라는 미래는 요원하다. 그럴 때는 나의 일기를 읽고 나의 메모를 읽는다. 사라진 줄 알았던 어제들이 있다. 매일의 최선이 있고, 매일의 다짐이 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걸었던 내가 있다. 나는 곧 내가 해낸 결과물보다 내가 버둥대며 남긴 과정을 더 사랑하게 된다.  


* 돌덩이

내 마음은 한없이 가벼워서, 내가 뭔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금방 날아가곤 한다. 방황하고 배회할 때 메모는 나를 현실에 발붙이게 해주는 유일한 무게추가 된다. 나는 내가 쓴 메모에 의지해 오늘을 걷는다.  

마음은 씀으로써 남고, 씀으로써 사라진다. 반려견을 보낸 뒤 나는 한동안 슬프다고, 슬프다고만 썼다. 그다음에는 슬픔이 덜해서 슬프다고 썼고, 한참 뒤에는 슬프고 싶어서 슬프다고 썼다. 1년 전에는 반려견의 사진과 유기견 센터에 기부하고 남은 몇 안 되는 반려견의 물건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난다고 썼다. 반년 전에는 반려견의 사진을 보며 웃고, 반려견과 닮은 강아지를 바깥에서 만나면 운다고 썼다. 


* 반려견

12월이 되니 낮 최고 기온이 40도를 넘는다는 뉴스가 나오기 시작한다. 산책을 하던 몰티즈도 힘들었는지 주인을 따라 털레털레 걷다 네 다리를 뻗고 길에 엎드린다. 주인들은 강아지를 이해한다는 듯 조금 웃고는 서서 대화를 나눈다. 그런 강아지를 쳐다보던 나는 길거리에서 운다. 나에게도 사랑하던 강아지가 있었다는 기억 때문에. 더위에 지쳐 아스팔트 바닥에 배를 대고 누운 나의 작고 늙은 강아지를 안아 올리던 시절이 생각났기 때문에. 이제는 그런 시절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기 때문에. 영영 놓지 않을 추억이 몇 번이고 손 쓸 수 없이 밀려올 테지만, 슬픔의 강도는 천천히 줄어들 거란 사실 때문에.



그런 감정들은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져서 적지 않으면 잊어버릴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슬픔에 젖어 쓰고 기뻐서 쓰고 별일이 없어서 썼다. 그렇게 쓰고 난 뒤에야 기쁨도 슬픔도, 별일도 별일 아닌 일도 털어낼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메모엔 내가 쓰고 잊어버린 이야기들이 있었다.



당시 노트에 쓴 것들이 무의식에라도 남아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어느 날 무심코 한 내 행동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믿는다. 이게 메모를 하는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무심코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 좋은 것이기 위해서. 

책 <<아무튼, 메모>> p.36 



<<아무튼, 메모>>를 위한 글을 쓰기 위해 책을 꺼내 들고 아무 페이지나 읽다가 이번엔 이 문장에서 읽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내가 왜 메모를 하는지를 떠올렸다. 내가 메모를 ‘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무엇인가가 되고 싶지 ‘않아서’ 이기도 하다. 


나는 이러한 이유들로 메모를 한다. 하루를 흘려보내고 싶지 않아서, 사소한 기쁨을 잊지 않기 위해서, 중요한 일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이런 일들은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이지만, 내 안에 내내 부정형으로 남는다. 무의식 중에 남는 이야기들이 긍정적이고 ‘좋은 것’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메모장에 내가 메모를 하는 이유를 고쳐 적었다. 하루를 소중히 하기 위해서, 기쁨을 기억하기 위해서, 중요한 일들을 되새기기 위해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내가 바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내가 바라는 사람일까? 결과보다 과정을 아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과정을 적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어떤 길을 걸었는지를 적어야 하고, 내가 어떤 고민을 했는지 적어야 했다.



*오목 렌즈와 볼록 렌즈

각기 다른 렌즈를 통해 나와 사람들을 바라본다. 렌즈 너머 사람들은 각자 크고 아름다운 삶을 꾸려 나간다. 렌즈 너머 나는 언제나 기대했던 것보다 작고 부족한 점이 많다. 내 안경인 줄만 알았던 편견의 렌즈를 벗고 나니 비로소 원근감이 돌아온다. 멋진 결과를 쉽게 내는 줄만 알았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쓰고 있다. 나 역시, 내가 바라보던 것만큼 작지 않다. 커다란 흠 인줄 알았던 몸과 마음의 요철들은 고유한 무늬나 결처럼 보이기도 한다. 흉터를 일부러 숨기지 않기로 했다. 내가 바라지 않았던 나의 일부들이지만, 그 과정이 없었더라면 나는 다른 어딘가에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나를 완전히 좋아할 수는 없지만, 부족하고 초라한 나도 그럭저럭 괜찮다고 말할 수는 있다.



내가 적은 메모에는 온갖 말들이 많다. 나중에 글로 풀어낼 만한 글감이나 괜찮은 발상만 적어내면 효율적이겠지만 두 번 다시 안 읽을 잡담이 될지, 읽을 때마다 웃게 만들 일화가 될지, 장편 소설의 씨앗이 될지 쓸 때는 알 수 없다. 그러니 지금은 생각나는 대로 적어야 한다. 메모는 비효율적이다. 보이는 성과가 없고 대단한 쓸모가 없다. 적은 이야기 대부분은 소소할 뿐이라 다시 읽을 때 웃음 짓게 만드는 용으로 남곤 한다. 메모는 그런 의미로도 충분하다. 적지 않았다면 잃어버렸을 웃음을 되돌려 놓는 정도로도. 


인생의 효율을 따지자면 잠자는 시간은 아껴야 하고 일하는 시간은 늘려야 하고 가족은 덜 만나고 직장 동료는 더 만나야 한다. 나는 굳이 인생의 효율을 따지지 않았음에도 그런 식으로 직장을 다녔다. 그땐 몇 줄의 낙서를 남기지도 못할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냈는데, 마지막에는 ‘이렇게 살지 말자’는 문장을 노트에 적고 퇴사했다. 마감일을 맞추려고 회사에서 밤샘 작업을 한 뒤, 함께 작업을 한 동료와 홍대에 나가 (회사가 홍대 근처였다) 곱창을 먹었던 날이나 회사 카드로 저녁을 사 먹으며 야근해야 하는 상황을 위로받았던 기억들만이 그 시기의 작은 빛들로 남아 있다. 그런 이야기들은 어디에도 적지 않았지만 여전히 내 안에 있다. 나는 이제 더 열심히 적는다. 적었다면 더 많이, 더 오래 남았을 빛의 순간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꿈을 꾼 날엔 일어나자마자 책상 앞에 앉아 메모를 한다. 메모장엔 꿈 얘기가 많다. 예쁘고 노란 샤프펜슬을 선물 받는 꿈, 고등학생인 내가 친구들과 급식실에 모여 앉아 저녁을 먹으며 수다 떠는 꿈, 붕어싸만코 아이스크림을 먹으려고 포장지를 뜯었는데 붕어싸만코 모양의 마스크팩이 나오는 꿈, 발목에 자물쇠가 걸려 있어 도망갈 수 없는 고양이들이 잔뜩 나오는 꿈…. 자기 전에는 램프의 빛이 동그랗게 떨어지는 곳에 작은 노트를 두고 꿈을 적는다. 꽤 괜찮은 글을 완성하는 꿈, 읽느라 고전했던 책을 끝까지 다 읽고 시원스레 덮는 꿈, 마라톤에 도전하는 꿈, 오래 만나지 못한 사람들과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 꿈, 매일 조금씩 변화를 실감하는 꿈…. 이런 꿈들은 꿈속의 꿈들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내가 꾼 꿈과 내가 꾸고 싶은 꿈들은 메모장 안에 ‘꿈’이라는 이름 아래 한데 섞인다. 그 이야기들이 내 머릿속에 있던 기억의 조각들인지, 내가 바라는 마음의 조각들인지 구분하지 못할 때도 많다.


메모는 지금의 나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다. 오늘 쓰는 나는 괜찮다. 오늘 적는 나는 괜찮다. 대단하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말들, 내가 더 나아질 거라는 믿음 안에서 나는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쓴 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말들이었다. 메모를 썼다는 사실조차 잊을 때가 많다. 메모는 내가 적은 순간부터 내 노트 안에, 내 머릿속에, 내 삶 안에 남는다. 많은 낱말들은 몇 번의 울음으로 쓸려 내려가지만 어떤 이야기들은 기어코 나를 붙들어 매고 나를 버리지 않는다. 내가 단어를 버리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나를 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내게 말했고, 나는 그들을 적었고, 그들은 마침내 내가 되었다. 나는 초라한 그대로도 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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