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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시 Oct 19. 2021

까마귀의 실수

<<딸은 애도하지 않는다>> & <차사본풀이>

한 번도 장녀 됨을 원하지 않았기에 부모님이 기대한 장녀의 모습을 무수히 배반하며 자랐지만 엄마가 언젠가 죽는다면, 생각만으로도 괴롭지만, 상주는 나 혹은 우리 자매 모두여야만 한다. 고심 끝에 생각해낸 장녀가 가진 거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또 좋은 점 아시는 분?) 사랑하는 엄마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사람이 나였으면 한다. 음식만 준비하고 뒤로 빠지는 사람이 아니라 엄마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고, 엄마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슬퍼하는 사람으로. 


상주는 남자만 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남자가 상주가 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여전한 듯하다. 사과집의 <<딸은 애도하지 않는다>>에는 귀국하고 한 달도 안 돼 갑작스럽게 아빠를 잃은 딸이 정신없이 장례식장에 들어가는 이야기가 가장 먼저 나온다. 딸이 둘이나 있지만 사촌 오빠가 당연히 상주가 되던 순간, 성인 여자가 아니라 어린애 대하듯 다뤄진 기억, 장례 문화를 모르기에 주변부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기묘한 풍경이 거기에 있다.


상주에 대한 고민을 종종 했지만 엄마에게 ‘엄마의 상주가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어떤 좋은 말을 붙여도 ‘당신이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로 곡해받기 쉬우니까. 

"엄마, 엄마 유언장에 나를 상주로 써달라고 적어줘." 

엄마가 유언장을 써뒀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내가 이렇게 말했을 때 엄마는 내 말을 "바보 같은 소리"로 치부했다. 엄마는 당신의 장례 상주를 나의 사촌 오빠(이자 엄마의 가장 큰 조카) 혹은 내 미래의 남편으로 정해둔 듯했다. 엄마는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했다. 


중요하지 않은 일인가? 상주가 누가 되었든 엄마가 잘 떠날 수 있게 준비하면 그걸로 된 일인가? 확실히 그런 일에 집착하는 내가 이상하기도 했다. 내가 진심으로 상주가 되고 싶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여자가 할 수 없는 일에 덤벼들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당장 결정할 필요가 없는 사소한 일일지도 몰랐다. 엄마의 상주야 누가 되든 나는 엄마가 오래 살았으면 좋겠고, 언젠가 그 일이 닥칠 때 엄마는 없을 테니 내가 상주를 하겠다고 나서면 될 일이었다. 


아니, 세상 일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언제나 최악을 상상하는 나의 머릿속엔 이미 친척들과 싸우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 상주가 뭐가 중요하니, 이런 데서 시끄럽게 구는 건 보기 좋지 않아, 너는 잘 모를 테니 그냥 어른이 하라는 대로 따르면 돼, 같은 말들을 듣는 나. 상상 속에서 친척은 모두 늙었지만 나는 여전히 어린 나로 남아 있다. 나는 ‘진짜’ 어른들의 입맛대로 커졌다 작아졌다 한다. 평소에는 다 큰 여자가 어떻게 낯선 땅에서 산다는 철없는 결정을 했냐고, 혼자 있는 엄마가 걱정되지도 않냐고 하면서, 장례식장 같은 공적인 자리에서는 어린 사람으로 취급하던 일이 떠올랐다. 나는 상주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엄마의 인정을 받고 싶었다. 엄마의 마지막을 책임질 만한 든든한 사람이 나라는 사실을, 누군가와 싸워서 쟁취해내는 게 아니라 당연히 내게 주어지는 것이기를 바랐다.



대학교 고전 문학 강의 때 읽었던 이야기 중 제주도 설화를 가장 좋아한다. 과학이 지금처럼 융숭하지 않았을 때, 오직 이야기로 세계를 이해하려 했던 사람들의 시도를 듣는 게 재밌다. 자연재해는 왜 일어날까? 일식과 월식은 왜 생길까? 왜 사람들은 온 순서대로 죽지 않을까? 제주도 무가 설화인 <차사본풀이>에는 옛사람들이 이해한 죽음 이야기가 나온다. 과양생의 세 아들이 왜 열다섯에 요절했는지 이유를 찾기 위해 강림이 저승으로 가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나는 마지막 부분에 적힌 몇 줄의 이야기에 오래 사로잡혔다.


염라왕은 저승으로 갈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적배지를 인간 세상에 전달하라는 임무를 강림에게 전달한다. 그런데 까마귀의 실수로 적배지가 섞여 버렸고, 그때부터 인간 죽음의 순서가 엉망진창이 되었다고 한다. 현대사회에는 까마귀와 저승차사가 끼어들 여지가 없지만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곤 한다. 잘못을 저지를 시간도 없었을 듯한 어린아이들이 짧은 생 내내 아프다 죽으면 괴롭고, 선한 사람이 선한 일을 하다 떠나면 눈물이 나고,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 가라앉으면 나도 진창에 처박힌다. 세상이 왜 이렇게 작동할까? 거기엔 이유가 없다. 그러니 아무 이야기라도 믿고 싶어 진다. 저승차사의 실수, 까마귀의 실수로 세상이 이렇게 어긋나 버렸다고. 우리의 세상은 원래 더 질서 있고 평화로운 곳이었다고.


가족이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는 상관없이 부모님은 주기적으로 병원에 다닌다. 아빠는 급성장염과 인대 파열로 입원해 수술을 했다. 엄마는 정기적으로 약을 복용한다. 작년엔 복통으로 응급실에 갔고 올해는 원인 모를 통증으로 mri와 ct까지 찍었다. 할머니는 복용해야 하는 약이 많아 다 먹으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고 했다. 할머니 집에는 약국에서 지어온 약과 자식들이 선물한 영양제가 수북하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미래를 향한 발걸음은 죽음을 향한 달리기와 같다. 과양생은 요절한 세 아들을 떠나보낼 수가 없어 난동을 부렸다. 원님이 강림을 저승으로 보내 그들이 한시에 죽은 이유를 알아오라고 시킬 정도였으니 예사 난동은 아니었으리라.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사랑을 위해 저승에 가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프시케는 사랑하는 에로스와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고자 저승으로 가는 심부름을 마다하지 않는다. 오르페우스는 저승에 가기 위해 세상 사람들을 모두 울리는 음악을 연주했다. 이런 이야기는 세계 어디에나 있는지, 한국에도 아버지를 살릴 약수를 구하러 저승에 가는 바리데기 이야기가 있다. 아마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도처에 널려있을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질 수 없는 간절함이. 


죽음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들을 위해 저승에 갈 수도 없고 염라왕을 만날 수도 없다. 언젠가 닥칠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지는 못하더라도, 남은 시간을 후회로 채우지 않도록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애쓸 뿐이다. 현대의학이 나의 부모를 마냥 오래 살게 만드는 게 아니라 당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좋겠다.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을 받아들이고 싶은지를 생각했다. 장례식장을 지키고 손님을 맞이하는 사람으로서의 상주가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죽음의 방식을 이해하고 따르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 죽음을 이야기하기 꺼려하는 엄마의 속내를 파악하는 일이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다. 까마귀가 나와 가족의 적배지를 너무 앞에 섞어두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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