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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시 Oct 24. 2021

바다 앞에서 네 이름을 부르려다가

알랭 드 보통의 <<불안>>

충동적으로 속초로 가는 버스표를 끊었다, 고 말하면 멋있었을까. 한 줄로 축약하기엔 문장이 사실과 거짓 사이에 걸쳐 있다. 속초에 가고 싶었지만 집에서 한 번에 가는 대중교통이 없어서 강릉까지 가는 버스표를 구입했다. 강릉까지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다른 터미널을 한번 더 거쳐야만 했다. 아침 일찍 동네 터미널까지 걸어가 옆 지역 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탔다. 옆 지역 터미널에 머무르며 강릉행 버스 시간을 계속 확인했다. 출발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편의점에서 물 한 병이랑 초콜릿을 샀다. 강릉까지는 3시간 반 정도 걸렸고, 거기서 다시 속초 가는 버스를 탔다. 집을 떠난 지 여섯 시간 만에, 세 대의 버스로 두 개의 도시를 들러 도착한 목적지였다.



목적지라는 말은 불분명하다. 속초는 도착지일 뿐, 시간을 들여온 이유와 뚜렷한 목적이 없으니 목적지라고 부를 수 없다. 버스 안에서 깔끔하고 보안이 괜찮아 보이는 호텔을 1박으로 예약한 것 말고는 계획한 일이 없었다. 가고 싶은 서점이 몇 개 떠올랐지만 우선은 늦은 점심부터 먹어야 했다. 백팩을 둘러메고 걸었다. 속초에 왔으니 한 끼는 해산물을 먹어야 할 것 같아 전복뚝배기를 주문했다. 음식을 내주면서 주인분이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전복이 살아 있으니 국물에 잠기도록 집어 넣어 익힌 다음에 먹으라면서. 뚝배기 안의 전복은 정말로 움직이고 있었다.


전복을 본 순간 막연한 거부감이 들었다. 신선한 재료를 보여주려는 음식점의 의도는 잘 알지만, 나는 살아 있는 음식이 싫다. 살고 싶은 버둥거림에서 생명력을 느끼는 건 고역이다. 먹어야 한다면 확실하게 죽은 것이 좋다. 시뻘건 고기는 식욕을 돋우지만 핏기 어린 고기를 씹고 싶지는 않다. 이것이 한때 생명이었음을 상기하게 만든다. 오직 죽은 것만이 나를 안심시킨다. 

죽어 있는 생명을 먹는 것과 살아 있던 생명을 죽여서 먹는 것 사이의 괴리감. 나 역시 도축의 한 고리로 자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당시엔 그처럼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전복이 꿈틀대는 광경이 불편했을 뿐. 전복을 뚝배기 가장 아랫부분으로 집어넣어 숨겼다. 그때는 그것으로 족했다.


호텔에 짐을 놓고 나와 문우당서점에 갔다. 그즈음 내가 갖고 있던 규칙 하나는 ‘서점에 가면 책을 한 권 산다’였다. 서가를 훑어보며 서점 직원들이 어떤 의도로 큐레이션을 했을지를 생각하며 책 한 권을 고른다. 어떤 책이든 사겠다고 마음먹으면 그곳에서 만날 수 있는 최선의 한 권을 고르기 위해 서점을 즐기게 된다. 서점에서 고른 책은 <<월간 생활 도구>>였다. 개인의 취향을 설명하는 책은 많지만 어떤 책은 개인사를 털어놓는 데 지나치게 집중해 이야기를 매몰시키기도 한다. 이 책은 너무 사사로운 이야기로 빠지지 않으면서도 흥미를 잡아 끄는 물건 자체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어서 좋았다. 


1층으로 내려와 계산을 하려고 보니 부자 뻘로 보이는 남자 두 분이 계산대에 계셨다. 내 차림새 휴가 모드가 아니었을까, 아니면 낯빛이 안 좋았을까, 아니면 그냥 별 뜻 없이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 뱉은 말이었을까. 나이 많은 직원분이 날씨도 좋은데 왜 바다에 가서 쉬지를 않고 서점에 왔냐고 물었다. 나는 서점에 가는 게 쉬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7월의 바다를 앞에 두고 나는 주위만 돌았다. 7월의 휴가와는 먼 발걸음이었다. 식전 빵이 나오는 레스토랑에 가서 혼자 마르게리타 피자를 한 판 먹고 해가 진 호수 주변을 걸었다. 호수 안쪽까지 걸어갈 수 있게 만든 길을 따라 정자에 서있으니 물가에서 탁, 탁, 하고 뭔가가 튀어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쉬기 위해 물고기들이 뭍에 얼굴을 내밀거나 튀어 오르곤 한다는데, 그때는 이유를 몰라 정자 아래를 한참 쳐다봤다.


소리를 내는 게 물고기인 건 알았지만, 어둠 속에서 물고기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탁, 하고 물고기가 튀어 오르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면 시선이 닿는 곳에는 이미 아무것도 없는 식이었다. 메아리를 쫓는 일. 바로 전까지 있었지만 이제는 없는 것을 찾는 일. 내가 하는 일도 꼭 그랬다. 돌아오지 않는 것을 뒤늦게 원하거나, 마음 졸여봤자 소용없는 일을 물고 늘어졌다.


새벽 네 시가 갓 넘었을 즈음에 일어나 지갑만 챙겨 들고나갔다. 일출 명소라는 영금정에는 이미 열댓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1월 1일 같은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해를 보려고 아침 일찍부터 길을 떠나온 사람들은 언제나 있다. 그들 마음에는 기대나 설렘이 있겠지. 커다란 삼각대까지 갖추고 좋은 자리를 잡은 사람 옆에 서서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수평선 위로 구름이 길게 찢은 솜사탕처럼 흩어져 있었다. 맑은 하늘 위로 해가 또렷하게 올라오는 풍경을 보지 못한 대도 괜찮았다. 슬픔으로부터 멀리 도망쳐서 일상을 잘라낼 수 있다면.



속초에 가기 일주일 전, 열다섯 살 반려견이 죽었다. 이 말은 어색하다. 속초행은 정해진 일정이 아니었다. 반려견이 건강했다면 속초에 갈 일도 없었다. 반려견이 죽어서 속초에 갔다, 로 정정해야 옳다. 네가 있었다면 맞을 리 없었던 미래였다. 아침저녁으로 약을 먹인 지 1년이나 되었을까. 반려견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졌다. 몇 주전만 해도 잘 뛰었는데 한 주 전부터는 걷기만 했다. 죽기 며칠 전부터는 걷기를 포기하듯 주저앉는 때가 더 많았다. 오이디푸스는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줄도 모르고 진실을 찾아 내달린다. 오이디푸스의 진실이 그러하듯 의사가 내린 진단도 선고가 아니라 예언이었던 게 아닐까, 한참을 의심했다.


가끔 보는 의학 드라마에 그런 장면이 나온다. 멀쩡하게 잘 살던 사람이 어딘가 아파서 병원에 간다. 두통, 어지럼증 같은 가벼운 증상으로 간 터라 걱정 없이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데 의사가 손에는 의료 차트를 들고 심각한 표정으로 병실에 들어온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몸을 하고 있군요’를 돌려 말한다. 덜 아프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라든가 앞으로 몇 개월 정도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같은 식으로. 어제 괜찮던 사람이 오늘 갑자기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그 때부터 그는 죽음을 향해 맹렬히 달려간다. 몸의 주인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몸은 제멋대로 낡고 있다는 걸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반려견은 알고 있었을까. 제 몸은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졌고 곧 죽게 될 거란 걸.


"몸은 결국 닳으니까요, 오래 사용한 심장 판막이 너덜너덜해진 거죠." 

동물 병원 의사가 깍지 끼듯 열 손가락을 엇갈려 끼웠다가 펼치기를 반복했다. 움직일 때마다 손가락 사이사이 빈 곳으로 공기가 드나들듯, 판막 사이로 피가 새고 역류한다고 했다. 소형견과 노령견에게 자주 나타나는 병이라고 덧붙이면서. 반려견은 소형견이었고 노령견이기도 했지만 납득할 수는 없었다. 


80세 이상의 노인의 25 퍼센트가 치매를 앓는다는 말은 확률상 노인 네 명 중 한 명이 치매에 걸린다는 뜻이지만, 누구도 자신의 조부모 네 명 중 한 명이 치매에 걸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 흔한 질병에 걸리는 강아지가 하필 우리의 반려견이어야 했는지, 왜 화살이 정중앙에 꽂혔는지 물어볼 곳이 없었다.


빚쟁이에 쫓기는 사람처럼 방을 정리했다. 겨우 한두 번 밖에 못 먹인 간식과 장난감, 방석 같은 건 동생이 유기견 보호소에 기부했다. 추억할 만한 물건 하나 정도는 남겨둘 걸, 후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집 곳곳에 깃든 추억 때문에 잠들 수 없었다. 반려견이 자주 누워있던 구석, 사료 그릇을 두던 자리, 반려견을 위해 방문을 열어두던 습관. 그것들은 집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나는 집 밖으로 도망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다. 


동생은 “쫑이가 언니 올 때까지 기다렸나 봐”라고 말했다. “강아지 별에서 행복할 거”라는 말도 했다. 나는 그런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런 말은 잠깐의 위안은 주지만, 평생 기대어 살 수 있는 장치는 되어주지 못한다. 강아지는 죽었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스스로를 원망하기도 했다. 반려견이 다른 곳에서 행복하게 지내며 나를 기다리고 있고,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갖지 않는 스스로를 향한 원망. 죽음 뒤엔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확신을 버리지 못해서 괴롭다면, 그 마음마저 뼈아프게 삼켜내고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래서였을까, 일출을 봐야겠다고 결심한 건. 알랭 드 보통은 책 <<불안>>에서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 중 하나로 광활한 대지, 거대한 자연 보기를 권한다. 우리 자신이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남과의 비교로 지쳤을 때, 나를 사람이 아닌 자연과 비교하면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보잘것없게 느껴진다. 나도, 너도, 우리 모두, 죽음을 비껴갈 수 없는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 SF에 등장하는 ‘영생을 향한 욕망’에 공감하지 못하고, 저열함을 느낀 이유도 비슷했다. 모든 것이 불공평한 세상에서 단 하나 공평한 게 있다면 모두가 끝내 죽는다는 것뿐인데, 그 하나 남은 공평함마저 빼앗긴다는 이야기를 보면 내가 서있는 곳은 언제나 ‘빼앗기는 쪽’이란 걸 무심히 실감하곤 했다.


내가 속초에서 본 것은 단순한 일출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도록 지속되었을 태양의 떠오름, 파도의 일렁임, 물에 녹아든 눈물의 노란빛… 내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있어왔고 반려견이 죽은 뒤에도, 내가 죽은 뒤에도 계속될 거대한 반복. 물론 거기에도 끝은 있다. 자연의 시간에 비하면 내 시간은 너무 짧고, 애도는 찰나에 불과하다. 슬픔이 지나간 후엔 무뎌진 마음을 원망하며 슬픔을 다시 느끼고 싶어할 지도 모른다. 


이제까지의 고통은 세차게 내리는 비와 같았다. 기댈 곳이 없어 비뚤게 선 인간 위로 내리는 비. 고통은 땅으로 고이다 작은 물줄기로 이어져 고요한 바다로 편입될 것이다. 나는 그 물줄기를 따라 걸을 수도 있고 바다에 빠질 수도 있고 바다 너머로 나아갈 수도 있다. 바다 앞에서 네 이름을 부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네가 내 안에 있는 한 입 밖으로 꺼낼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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