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시의 마법사>>
사람의 기분은 변덕스럽고 가벼워 저는 기상 시간이 이르면 이를수록 더 행복해집니다. 마지노선이 있다면 여섯 시쯤일까요? 여섯 시 이후에 일어나면 아침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단 생각에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우울해집니다. 그럴 때면 찬물을 얼굴에 끼얹으며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냅니다. 그런 다음엔 30분 정도 책을 읽습니다. 어떤 날엔 '새벽 독서'를 하고, 어떤 날엔 '아침 독서'를 합니다. 몇 시에 일어나든 책장에서 책을 꺼내거나 아이패드를 들기만 하면 몰입할 준비는 끝나 있습니다.
아침 독서의 주인공은 책이겠지요. 저는 읽을 엄두가 안 나는 두꺼운 책을 고릅니다. 제가 새벽에 읽었던 카프카의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1000쪽)나 수전 팔루디의 <<백래시>>(840쪽) 같은 책은 절대 하루 만에 읽을 수 없는 책들이죠. 어제는 수전 팔루디의 <<백래시>>를 끝까지 읽었습니다. 한참 남은 줄 알았는데 남은 100여 쪽이 주석이었습니다. 의외로 빨리 읽었다는 기분이 들어 책 마지막을 덮을 때 무척 즐거웠습니다.
독서노트를 끝까지 쓴 다음에 무슨 책을 읽을까, 행복한 고민을 했습니다. 읽을 책이 없어서 고민하는 일은 없고, 언제나 읽지 못한 책들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괴로움만 이어집니다. 한없이 게으른 자신을 책망하면서, 유한한 시간을 아까워하면서.
제가 오늘 새벽에 읽기 시작한 책은 어슐러 르 귄의 <<어스시의 마법사>>였습니다. ‘어스시 전집’으로 알려진 여섯 권의 시리즈 중 첫 번째 책이었습니다. 저는 새벽 독서용으로 보통 비문학을 고릅니다. 소설은 한번 속도가 붙으면 끊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30분만 읽겠다는 다짐은 다시 말해 '30분 읽기도 힘든' 책을 붙들고 있겠다는 각오와도 같습니다. 그런 뜻에서 보자면 어스시 시리즈는 재밌는 소설에 속하기 때문에 읽으려고 하면 언제든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가짐, '읽으려고 하면 언제든 읽을 수 있다'는 그 안일한 마음 때문에 저는 이 책을 계속 미루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2권까지 읽었지만 독서노트를 적어두지 않은 터라 내용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이러다간 정말 영영 못 읽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절반쯤은 충동적인 마음으로 다시 1권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새벽 독서를 위해 할애한 30분이 지나면 독서노트와 책을 덮는 게 규칙인데 저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읽다 그만 한 시간 동안 그 책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저는 백수라 꼭 해야 할 일은 거의 없지만, 제 나름의 규칙을 지키고 있습니다. 책을 읽은 다음에는 아침을 먹고, 그다음에는 글을 써야 합니다. 오늘은 장을 보는 날이기도 해서, 식단도 미리 정해야 합니다.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세운 소소한 규칙들을 지켜야 삶이 굴러가니까요. 더 읽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책을 덮고 아침을 먹고, 장보기 목록을 작성한 뒤에 책상에 앉았습니다. 글을 써야 할 시간입니다. 이런저런 일을 하는 와중에도 책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저는 고민 끝에 이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보통은 소설을 쓰지만, 글쓰기에 규칙이란 게 있다면, '쓰고 싶은 걸 쓴다'일 테니까요.
<<어스시의 마법사>>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들이 반짝이는 이야기들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이름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열세 살이 되면 아이들은 성인식을 거치면서 아명 대신 새 이름을 받습니다. 그 이름은 아무에게나 알려줘서는 안 되는데, 이름에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새매'나 '들콩' 같은 별명으로 서로를 부르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진짜 이름을 알려줍니다. 오래된 언어를 이해하고 되뇌며 힘을 받는 마법사들은 더더욱 자신의 이름을 숨겨야 합니다. 다른 마법사에게 진짜 이름을 들켰을 때, 이름이 불린 마법사는 언어에 구속돼 힘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말에 힘이 깃든 세계. 진짜 이름을 부르면 상대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세계. 나의 이름이 고백이 되는 세계. 이 얼마나 비밀스럽고도 아름다운 세계인가요. 진실한 나의 이름은 너무 많이 써서 의미를 잃은 사랑의 말보다 더 무겁고 우아합니다. 책 속 세계에서 누군가는 이름을 알려주고 싶은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슬픔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전 흔한 제 이름을 싫어했습니다. 학년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가 한 명씩은 있었고, 대학 시절엔 성과 이름이 똑같은 사람을 만날 정도였습니다. 개명을 생각했을 정도로 제 이름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름에 남들이 모르는 특별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면 단어를 내뱉기도 전에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작가 어슐러 르 귄은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 들었던 여러 이야기와 자라며 만난 사람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인류학자였던 아버지를 만나러 온 다른 나라 사람들, 다른 문화권에서 거주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들으며 르 귄은 자연스럽게 상상력을 키워나가지 않았을까요? 어슐러 르 귄의 어머니가 출판한 <<이시 이야기Ishi in Two Worlds>>는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아버지인 앨프리드Alfred가 자료를 모았지만 책으로 완성하지 못하자 어머니 시오도라Theodora가 자료를 정리해 출판한 책입니다.
이시는 사라진 줄 알았던 미국 원주민 부족 중 하나인 야히Yahi족의 마지막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부족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으로 캘리포니아에 나타났고 순식간에 유명해졌습니다. 그는 이후 박물관에서 일하며 화살촉을 만드는 방법이나 나무 공예 같은 부족의 문화를 알려주었습니다. 이시의 부족에게는 외부인에게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이시Ishi는 야히족 말로 '사람'을 뜻합니다. 세상에 마지막 생존자로 드러난 지 5년 만에 이시는 결핵으로 사망합니다.
이시라는 사람을 떠올려 봅니다. 이시의 모습은 사진으로 남아 있기에 그 상상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을 추측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진정한 '우리'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에게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 한 사내, 그는 5년 동안 자신의 이름 대신 '사람'이라는 모두를 지칭하는 별칭을 허락했을 뿐입니다. 아마도 그가 함께 했을 부족 사람이 죽었을 때, 그의 진짜 이름을 불러주던 사람도 영원히 사라져 버린 셈이죠. 누구도 특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이름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궁금해집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내 이름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는 그리 중요한 얘기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또는 내 이름을 누가 불러주냐에 따라 그 이름이 가진 의미는 천차만별로 달라지겠죠. 이시가 가지고 있었을 이름, 이제는 영영 알 수 없게 된 그의 이름이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는, 그의 이름이 독특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약하고 뿌리가 얕은 사람은 확인 충동에 쉽게 휩쓸립니다.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란 걸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보이지 않는 사랑을 말로 증명받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듣는 사랑의 단어들은 아주 가벼워 몇 번을 들어도 마음에 차지 않습니다.
<<어스시의 마법사>>의 주인공 '새매'는 마법 주문으로 자잘한 집안일을 해치우던 이모를 따라 주문을 외다가 자신의 힘을 깨닫게 됩니다. 더 큰 힘이 갖고 싶고, 더 멀리 나가고 싶어 마법 학교에 입학한 그는 호기심과 무모함,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는 감정에 휩쓸려 죽은 영혼을 불러오는 주문을 외워 버립니다. 너무도 큰 힘을 써버린 탓에 한동안 제대로 말도 할 수 없었던 '새매'는 갑작스럽게 학교를 떠나는 벗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섭섭해집니다. 자신이 아플 때 한 번도 찾아와 주지 않은 데다가 이제는 만날 수도 없게 되었으니까요. 벗은 '새매'를 향해 웃으며 자신이 찾아갈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고, 다른 말 대신 자신의 이름을 알려줍니다. '새매'는 더 이상 벗의 우정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벗이 알려준 진짜 이름은 앞으로 어떤 미래가 닥치든 함께 하겠다는 각오이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으며 이런 세상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내내 들었습니다. 마법이 존재하는 신기한 세계를 향한 호기심이기도 하고, 세상 모든 사물의 이름이 중요한 세계를 향한 호기심이기도 합니다. 그런 세계에서 살 수 없으니 대신 저는 이 책을 계속 읽으려 합니다. 읽다 만 책의 뒷이야기가 궁금해 끝까지 읽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어스시 세계에 살지는 못하더라도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때 조금 더 신경 써서 부르고 싶습니다. 너무 많고 쉬워서 모든 것이 가벼워진 세계에서 사랑을 담아 상냥하게 이름을 부르고 싶습니다. 그러면 세상에 험한 말은 사라지고, 우리의 이름은 그만큼 아름다워질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