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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시 Oct 24. 2021

기억과 경험과 증언 사이

이야기를 시작하며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는 두세 살쯤 된 내가 있다. 밥솥이 내뱉는 하얀 공기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던 나는 이내 공기가 나오는 밥솥 구멍에 손을 올린다. (앗 뜨거!) 나는 빨갛고 동그란 상처가 손바닥에 생긴 정도로 그날을 기억하지만, 아빠의 말은 다르다. 


“눈을 잠시 다른 데 돌린 사이에 손바닥 살갗이 다 벗겨져 있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아빠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를 차를 태워 응급실에 갔다고 했다. 지금 내 손바닥에는 그때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다섯 살 때의 기억은 어떨까. 라면을 끓이던 엄마 옆에 서있던 나는 촐랑대다 냄비를 엎었고, 라면은 고스란히 나에게 쏟아졌다. 오른 팔다리에 화상을 입고 응급실에 갔다. 아빠랑 판자 뛰어넘기를 하며 놀다가 판자 모서리에 세게 부딪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피가 안 멈춰서 피범벅이 된 신발을 신고 응급실에 간 기억도 있다. 꿰맨 흉터는 아직도 발목 부근에 남아 있다.


이쯤 되면 어린 시절의 강렬한 고통이나 인상 깊은 사건 위주로 기억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나는 이 기억이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옆에서 까불대다가 라면 엎었잖아.”

“네가 얼마나 촐싹거렸는지…”


내가 했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은 바깥으로 흘러나갔다가 말과 몸에 남은 상흔으로 돌아와 내 안에 남았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처럼 나를 바라보는 시야를 가질 수 있을까. 기억은 온전하지 않고,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야기들에 가깝다. 내가 정말로 기억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이야기들은 초등학교 고학년 혹은 중학교 때부터의 일이지만, 그 기억들도 타인의 기억과 비교하면 어딘가 헐어 있을 게 분명하다.  



책을 읽는 일은 기억하는 일과 비슷하다. 내가 살며 겪는 모든 일들을 기억할 수 없듯이, 내가 읽은 책도 다 기억할 수 없다. 읽었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 책의 내용은 깨끗하게 잊어버리기도 하고, 오랜만에 다시 읽은 책의 이야기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와 너무 달라 머쓱할 때도 있다. 기억의 오류를 줄이기 위해, 조금이나마 더 오래 기억하기 위해 읽는 동안 적고 자주 되짚으며 이야기를 다시 생각했다.


살며 읽은 책은 많지만 그중 일부만이 나를 고민하게 만들고, 나를 바꾸고, 끝내 나의 조각이 된다. 생각하고 떠올리고 골몰하다 보니 마치 그 이야기가 내 기억의 일부가 된 것만 같은 순간들, 내가 쓴 글에는 그런 순간들이 모여 있다. 책을 통해 몇 번이나 다른 생을 살고, 그 경험을 통해 나의 생을 일궈나간다. 잠시나마 타인이 되어 보며 사람을 사랑할 기회를 얻는다.



카프카는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는 말을 편지에 남겼다.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책보다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을 필요로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내 마음을 건드린 책에는 카프카가 말한 요소들이 있다. 재앙 같기도, 죽음 같기도, 추방 같기도 한 어렴풋한 비애들. 슬픔과 괴로움과 고독을 말하는 책들. 동시에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기를 선택한 이야기들이기도 했다. 고여있기보다 흐르기를, 침묵보다 말하기를 선택한 사람들의 선언문. 


내가 쓴 글에는 유달리 ‘내가’ 혹은 ‘나로’ 시작하는 문장이 많다. 책의 이야기를 따라갔다가, 그 안에서 헤매었다가, 나가기를 포기하고 머무르며 남긴 이야기들이 여기에 있다. 가끔은 10년도 더 된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터라 어쩔 수 없는 공백과 오류가 발생한다. 사실에서 멀어진 추억이 있을 수 있지만,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그대로 두거나 사실 관계를 따로 밝히려고 했다. 고장 난 기억들이 나를 여기로 데려왔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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