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나는 아이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의식하며 살았다.
지금에 와서야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그때의 나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기보다 늘 평가받는 수험생 같았다.
공공장소에만 가면 시험이 시작됐다. 감독관은 없었지만 관객은 많았다.
ADHD성향의 아이를 키우며 가장 힘들었던 건 아이의 행동이 아니었다.
아이는 늘 아이답게 살았을 뿐이다. 문제는 사람들의 눈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느라 바빴던 내 마음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생기고,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일이 흘러갈 때면
먼저 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이는 세상을 탐험하고 있었고,
나는 그 탐험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계산하고 있었다.
그때 마다 이런 말이 생각났다.
‘저 엄마는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 거지?’
아무도 그렇게 말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문장은 늘 내 머릿속에서 또렷했다.
마치 사람들이 다 같이 속으로 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 것처럼.
그 눈빛 하나하나가 나를 죄인으로 만들었고, 나는 그 자리에서 스스로를 심문했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내 양육의 모든 실패가 지금 이 순간에 요약된 건 아닐까.
그래서 종종 갈등했다. 지금이라도 단호하게 혼내야 하나.
사람들 앞에서 분명히 제지하면 ‘그래도 저 엄마는 노력하네’라는 인정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아이를 꾸짖으려는 순간마다 마음이 먼저 멈췄다.
아이는 이미 자기 안에서 충분히 복잡한 싸움을 하고 있었고,
거기에 내 체면까지 얹는 건 너무 잔인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웃으며 넘기자니 이번에는 ‘방임하는 엄마’라는 또 다른 오답이 떠올랐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나는 늘 어정쩡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해도 자연스럽지 않은 엄마였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동시에 세상의 평가를 함께 키우고 있었다.
아이는 하루하루 자라고 있었고, 나는 하루하루 더 조심스러워졌다.
창피함은 늘 따라다녔다. 그런데 지금에서야 알겠다.
그때의 창피함은 단순한 부끄러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외로움이었고, 두려움이었고,
‘혹시 내가 틀린 사람일까’라는 질문의 다른 이름이었다.
아이 때문이 아니라,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자꾸 시험대에 오르는 것 같아서 나는 그렇게 창피해졌던 것이다.
그 시절의 나는 창피함이라는 말로, 사실은 서툰 사랑을 꾹꾹 눌러 안고 살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안다.
그 사랑이 서툴렀을 뿐,
틀리지는 않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