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피함의 다른 이름: 화내지 않으려는 사랑

by 전이야

아이와 함께 외출하는 일은
늘 하나의 작전 같았다.



어디에 갈지, 무엇을 할지,
그다음에는 어디로 이동할지
모든 계획을 미리 머릿속에 그려두었다.


“마트에 갈거야, 그다음엔 놀이터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자.”
“카트는 밀어도 되는데, 너무 빨리 밀면 엄마가 가져갈거야”
“미끄럼틀 세 번만 더 타고 집에 갈 거야. 하나, 둘…”


그 시절의 나는
이런 말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예고는 예측을 낳는다.
예측은 아이에게 ‘괜찮은 예방'을

나에게는 '다행인 해방'을 주었다.
속으로는

"워~워~ 아들, 안정하소서"를

주문처럼 외우면서.


그게 나의 화 안내기 전략이었다.

‘예고’라는 이름의 안정장치.


아이의 배고픔과 졸림, 피로가
곧 산만함의 씨앗이 된다는 걸 알게 된 뒤로
나는 늘 아이의 컨디션을 먼저 챙겼다.

어디에 있든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이뿐 아니라
주변의 다른 아이들, 물건들, 동선들까지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시뮬레이션했다.

'저기서 뛰면 부딪히지 않을까?'

'저걸 건드리면 떨어지지 않을까?'

큰 가방 안에는

물과 간식, 물티슈와 휴지, 대일밴드,
모래놀이삽과

아이를 심심하게 하지 않을 장난감들이
늘 들어 있었다.


그 사소하고 귀찮은 준비들이
그때의 나에게는
‘예방의 사랑’이었다.


아이는 나를
당황하게도, 황당하게도 했다.

외로울 때도 그랬고,
화가 날 때도 그랬고,
너무 즐거울 때도 그랬다.


감정이 클수록
행동도 함께 커졌다.


기뻐서 소리 지르고,
분해서 울고,
외로워서 장난을 치는 모습은
처음엔 나를 무너뜨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안의 이유를 보게 되었다.


아이는 아직
감정을 담을 그릇이 작아서
모든 기분이
행동으로 넘쳐 흘렀던 거였다.


그걸 알아차린 뒤부터
나는 아이의 행동을
감정의 언어로 번역하려 애썼다.


“지금 많이 신났구나.”

“답답했겠다.”

“혼자 놀게 돼서 심심했구나.”

“엄마가 옆에 있으니까 안심해.”


그 말들은
아이에게 건네는 말이면서,
사실은 그 시절의 나에게도
함께 건네던 말이었다.


무안해서
스스로에게 해주던 말이기도 했다.


창피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이지 그랬다.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날카롭고,
나는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감정의 이름을
조금 다르게 불러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외로움의 다른 이름이었고,
지금의 내가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의 그림자였다.


서툴게 드러나면
창피함이 되었고,
끝내 숨기면
외로움으로 굳어졌다.


어쩌면 나는
그 두 감정 사이에서
계속 서툴게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이토록 예민하게 신경 쓰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분명했다.


사랑이었다.


나는 그때도 알고 있었다.
이 아이가 언젠가는
자기 몫의 삶을
해내게 될 거라는 걸.


그날이 올 때까지
나는 이 아이를 사랑하겠다고,
내 사랑과 양육이
결코 잘못되지 않았음을

믿어보겠다고.


믿기 어려운 그 믿음을
그 시절의 나는
매일 붙들고 살았다.


창피함 속에서도
나는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었고,
그 길의 이름은
결국 사랑이었다.






작가의 이전글창피함의 다른 이름: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서 지킨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