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다는 말 앞에 선, 엄마의 촉

by 전이야


아이의 발달이 조금 늦다거나,
조금 다르다는 이야기를 꺼내면
주변 사람들은 유난히 빠르게 반응했다.


“괜찮아. 성격 느긋한 애들이 늦기도 해.”
“OO이 애비도 말이 늦었다.”
“나 아는 애도 별났는데 지금 영재원 다니더라.”


이 말들은 늘 비슷한 방식으로 나왔다.
아이의 상황을 더 듣기 전에,
아이의 상태를 가늠하기 전에,
이미 결론부터 말해졌다.


솔직히 말하면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조금 놓이기도 했다.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은 들었다.


하지만 곧,
이야기를 더 해보기도 전에
대화가 거기서 멈춘 것 같아
조금 서운해졌다.


괜찮지 않은 것 같은 감각은 여전했지만,

괜찮다고 넘어가지 못하는 내가

괜히 예민한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괜히 걱정을 키우는 건 아닐까.
괜히 문제를 만드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뒤따랐다.


그래서
“괜찮다”는 결론은
안심이 되면서도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그 말들이 꼭 아이를 가볍게 봐서 나온 말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아이의 발달은
정답이 없고,
시간이 필요하고,
앞날이 열려 있었다.


그 열린 상태 앞에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상황을 조금이라도 정리하고 싶어 했다.
말로라도 닫아두고 싶어 했다.


“괜찮다”라는 말은
아이를 정확히 이해해서 나오는 말이라기보다,
그 불확실함을
자기 쪽에서 먼저 덜어내고 싶은 말일 때가 많았다.


누군가의 걱정을

있는 그대로 듣고 있는 일도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 불안을 잠시라도
함께 들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또 괜히 무능해 보이는 것 같고,
아무것도 안 해주는 사람처럼 느껴질까 봐
사람들은 말을 얹는다.


이 말은
상대를 위해서라기보다
‘내가 지금 도움을 주고 있다’는
감각을 주는 말일 때도 많았다.


그리고 좀더 솔직히 말하면
이 말에는
그 사람 자신의 삶을 지키려는 마음도 섞여 있었다.


친한 사람의 아이가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일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지금까지 믿어온

'아이들이 때가 되면 다 한다'는 경험담이 흔들리고

가까운 이의 삶이

예상보다 훨씬 복잡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오래 붙잡기보다
“괜찮다”는 말로
먼저 정리해준다.


이 말은
아이를 설명하기 위한 말이라기보다
그 사람 자신의 세계를
지켜내기 위한 말에 가깝다.


발달이 더딘 게 맞는 것 같다고,

아이가 남다른 것 같으니
병원에 가서 확인해 보면 어떻냐고 말하는 일은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왠지 악역을 맡은 것 같은 기분을 갖게 된다.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 같고,
괜히 불행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다.


무엇보다
가까운 사람의 삶에
‘문제’라는 단어를
내가 먼저 얹는 것 같아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차라리 “괜찮다”는 말을 선택한다.
그 말이 더 착해 보이고,
덜 아프게 들릴 것 같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괜찮다는 그 말들에는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과
불확실함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함께 들어가 있는 것 같다.


아이의 발달에 대한

의심을 수긍하는 이야기는

불안 속에서도

용기를 내어 아이를 함께 들여다보는 대화에 가깝다.

그런 용기는 흔하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직 잘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과 상대가 바라는 결론을 말하게 되는가 보다.


하지만
내가 결국 남기고 싶은 말은
그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진단의 자리까지 걸어온
엄마에 대한 이야기다.


주변의 “괜찮다”는 말 속에서도

아이를 계속 바라보고,

고민하고,

결국 확인까지 선택해 온 과정은

그 자체로 충분한 엄마의 촉이었다.


조금 늦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더라도
그 시간은
아이를 모르고 보낸 시간이 아니라,
아이를 알아가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망설였기 때문이 아니라,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려 애썼기 때문이다.


그 모든 선택이

엄마의 촉이었다.


그래서 지금 진단을
‘더 빨리 받았어야 했다’는 말은
필요하지 않다.


엄마였기 때문에

알아차릴 수 있었고,
엄마였기 때문에
그 불안을 피하지 않았다.


진단 받고 확인하는 순간,
다른 세상이 열릴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지나치지 않았다.


누군가

대신 해줄 수 없었던 고민을
끝까지 안고 왔고,
외면하지 않았다.


그걸로
이미 충분하다.


엄마였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는 걸 안다.

그 마음을
조용히 안아드린다.


정말

고생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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