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보이는 옥상

by B급선배

값싼 술과 주전부리를 챙겨서 우리는 건물 옥상에 올랐다. 그리고 이번엔 고시원 총무도 함께였다. 총무는 고시원 공동주방에서 주전부리를 챙겨 옥상으로 가는 우리 뒤를 자연스럽게 따라 왔다. 조금 전 고시원에 들어설 땐 알아채지 못했지만 지금 보니 교수님과 총무는 막역한 사이 같아 보였다. 서로 예의 바른 말투에 묘한 친밀감이 배어 있었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고 교수님보다는 어렸다. 통성명 뒤에 나는 그를 형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왠지 '님'을 붙여야 할 것 같은 형.


건물만큼 낡은 옥상은 바닥과 난간이 군데군데 허물어져 있었다. 난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과 플라스틱 화분 파편을 발로 치우면서 걸었다. 총무 형의 표정은 고시원 출입구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와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옥상의 개방감 덕분인지 다들 고시원 안에 있을 때보다 조금은 더 생기가 돌았다.


“야경이 참 좋네요.” 내가 말했다.

“죽이지? 내가 서울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이야.” 교수님이 말했다.


건물은 비록 낡았으나 규모는 상당했다. 건물이 완공될 당시에는 서울에 이만한 아파트가 없었고(의외로 주상복합 건물이다), 유명 연예인들이 들어와 살 정도로 매력적인 곳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누군가 건물의 역사를 말해주기 전까지는 과거의 영광을 짐작기가 쉽지 않았다. 건물 면적만큼 옥상도 넓어서 입주민이 드나드는 출입구도 여럿이고 곳곳에 바깥 편의점에서나 봄직한 파란색 간이 식탁과 의자도 놓여 있었다. 누가 가져다 놨을까. 교수님은 옥상 구석구석을 안내해주었다.


“그리고 여기,” 교수님은 나에게 난간 가까이 가보라고 주문했다. 옥상에는 조명이 없었다. 어둡고 잡동사니들로 어수선해서 난 조심스레 걸었다. 난간에 다 와서 교수님을 향해 돌아섰다. 보기 좋은 야경을 배경으로 나의 독사진을 찍어주려나 했던 것이다.


“아니, 내 쪽 말고 바깥쪽을 봐야지.”


멋쩍게 다시 돌아선 내 앞에 저 멀리 남산타워가 찬란하게 보였다. 시야 속 좌우의 건물들은 남산을 위한 프레임이 되고 있었다. 남산타워를 처음 보는 일도 아니었건만, 타인의 지시가 무심결 스쳐 간 풍경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남산이 가깝게 보였다. 금방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거리를 가늠한다고 옥상 아래를 내려다봤다. 자동차 후미등이 달밤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충무로와 명동 거리는 아직 한창이었다. 주변 오피스 건물도 틈틈이 점등 상태였다. 밝은 곳에선 어두운 곳이 보이지 않지만 어두운 곳에선 밝은 곳이 잘 보인다. 조명이라고는 옆 건물의 불빛에 겨우 의지하는 어둑한 옥상에서 나는 맞은 편 건물에 있는 사람들을 꼼꼼히도 살피고 있었다. 그들은 날 보지 못 했을 것이다.


“어떠냐? 여기가 서울의 한가운데다.“


“여기는 서울의 축소판 같아요."


낡은 건물 고시원과 고층 건물의 사무공간, 희망을 품은 사람들과 현실을 사는 사람들, 빛과 어둠. 단순명료한 대비가 좋았다. 이십 대는 심심하지 않다. 세계가 나를 위해 존재하니까. 모든 것에 의미가 있었다. 의미 따위는 없다는 태도에도 의도가 있었다.


"고시원에 살면서 공무원 준비하는 사람도 있고, 저 앞 건물에는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있고, 저 밑에 술에 취한 사람들, 저-기 잘 보이지는 않지만 남산엔 데이트하는 사람들 있을 거고.”


“야 인마, 야경 어떠냐니까. 넌 너무 진지해. 그냥 이리 와서 술이나 한 잔 해.”


옆건물 불빛에 의지하는 옥상에 주점이 열렸다. 눈이 크지 않은 총무 형이 킬킬 웃고 있었다. 교수님, 오늘 날씨 좋은데 바비큐 파티나 할까요, 라고 장난 섞인 말투로 그가 물었지만 교수님은 거절했다.


“우리는 저녁 먹고 들어와서 더는 못 먹어. 다음에 제대로 날 잡고 먹읍시다. 그리고 나 교수님 아니래도 그러네. 우리 편하게 말 하기로 했잖아.”


교수님과 나, 그리고 총무 형. 세 사람이 간이주점에 둘러앉았다. 차린 것은 없고 술만 많았다. 어두워 뵈는 것도 없어서 안주는 아무래도 괜찮았다. 나는 문득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는 총무 형이 이렇게 놀아도 되는 것인지 걱정스러웠다. 그의 눈매는 얄쌍했지만 체격은 제법 좋았다. 듣자하니 군 복무를 포항에서 했다고 말한다. 해병대를 나왔다는 뜻이다. 나도 내 소개를 시작했다. 배우가 되고 싶어서 신청한 교양수업에서 교수님을 만났고 어떻게 하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자, 교수님- 한 잔 하시죠- 우리 교수님을 위하여, 짠-“


나는 초면이었던 총무 형을 따라 함께 건배를 제의했다. 술잔을 든 손들이 여러차례 교차했고, 한동안 교수님과 총무 형은 둘만이 아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서로의 개인사나 마음 깊은 곳 관심사를 공유한 듯했다. 그들은 친밀했고 나는 낯설었다. 남산이 보이는 옥상의 간이주점에 빈 술병이 늘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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