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지도 못한 크리스마스이브

메리 크리스마스!

by 조재현

2019/12/24
이르쿠츠크로 돌아가는 길. 특별한 건 딱히 없었다. 늦게 타신 덩치가 상당히 큰 러시아 아주머니가 1인석인 나의 자리를 내가 화장실을 간 사이에 말없이 바꾼 후 내게 다른 자리를 가라는 러시아말로 한 것과 앞자리에 앉지 못해서 가는 길에 기가 먹힌 풍경을 찍지 못했다는 것이 약간의 빡침과 상당한 아쉬움이 있을 뿐.

롤링스톤스 호스텔로 도착하기 전 뒷좌석에 있는 한국인 아저씨가 나의 국적을 파악한 후 버스 낼 돈이 조금 부족한데 달러랑 조금 바꾸자고 한다. 지금 지갑 안에 있는 200 루블을 아저씨의 4달러와 바꿨다. 환전하긴 귀찮고 지금 달러 쓸 곳도 없는데 그냥 다른 나라에서 써야지.

도착한 후에 낮잠을 자버렸다. 짐 정리를 하고 나가서 시내 구경을 하려고 했지만 며칠간 늦게 잔 이유 탓인지 잠시 뻗었다. 구경은 내일 해야지. 6시에 일어나 은행에서 돈을 찾고 밥을 먹으러 나갔다. 맛집으로 알려진 '고려국시'식당을 찾으러 갔다.

크리스마스 행사. 여성들이 전통의상을 입은 게 인상 깊다.

atm기를 찾으러 나간 번화가에는 크리스마스이브의 행사를 하는 것이다. 전통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날 붙잡고 강강술래를 한다. 들은 바로는 러시아는 종교가 그리스 정교회라서 크리스마스가 1월 7일이라고 하는데 축제를 한다. 크리스마스가 언제인지는 뭐가 중요하랴? 그냥 같이 놀면 되는 거지. 노래가 나오는 동안 신나게 춤췄다.

크리스마스 행사.

잠깐 축제를 즐기고 옆 거리의 '고려국시'를 찾았다. 예전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한국인의 자손이 만들었다는 그곳. 문을 들어서는데 할아버지, 할머니가 춤을 추고 계신다. 혼자 온 나와는 대비되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봤다

파티를 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자리에 앉고 그렇게 유명한 그곳의 국수를 시켰다. 고춧가루와 함께 나온 국수. 블로그에 적혀 있던 대로 고춧가루를 듬뿍 넣고 젓가락으로 면 위에 얹어진 고명을 면들과 슥슥 섞었다. 면을 한입 넣어 몇 번 씹고 그릇을 들어 육수도 한입 들이켰다. '음~' 적당히 썰은 고기와 탱탱한 면발 그리고 적당히 시원한 새콤달콤한 육수가 입에 착착 감긴다. 뭔가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맛... 좋다.

'고려국시' 식당의 대표음식 '고려국시'

먹는 와중에 카바레가 켜진다. 그러더니 음악이 나오고 다들 춤을 춘다. 어떤 50대 정도의 아주머니는 탈의실 같은 곳에 들어가더니 속옷이 다 보이는 천조가리 같은 걸 입고 나오신다. 그리고 할아버지를 의자에 앉히시고 스트립쇼 비슷한 걸 하신다. 몇십년은 회춘한 듯한 모습이다. 세월 속에 숨겨둔 놀고 싶은 열정을 오늘 같은 특별한 날에 격렬하게 보여주시는 듯했다.

끈적하게 노시는 어르신들.

숙소로 돌아갔는데 방금 체크인한 듯한 한국인 여성 두 분이 종이를 내게 건넨다. 뭐지? 자세히 읽는데 글씨가 예쁘다. 내용은 오늘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고 싶은데 호스텔에서 같이 하자는 것이다. 순간 그분들이 호스텔 직원인 줄 알았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고 싶어서 직접 손으로 초대장을 써서 만들었다고 한다. 괜찮네.

한국인 여성 두분이 써주신 초대장.

아까 얘기를 나눴던 싱가폴 남자와 마트에 가서 술과 안주를 샀다. 맥주를 카트에 담고 보드카를 집었다. 소주 한잔에도 얼굴이 빨개지는 나는 그것을 다시 진열장에 넣었다. 싱가폴 남자가 그 모습을 보더니 자신이 보드카 사겠다면 집어서 계산대로 간다. 오늘 심하게 취하고 싶다고 한다. 뭐 취하는 건 너니 난 상관 안 하겠다.

같이 파티했던 사람들. 즐거웠다.

8시 반부터 파티가 시작됐다. 초대장에 간단하게 사면된다고 해서 맥주랑 안주 몇 개를 샀는데 다른 분들은 내가 민망할 정도로 많이 사 오셨다. 나중에 다시 나가야겠다. 다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얘기하는데 재밌다. 그들의 생각을 듣는 건 언제나 흥미롭다. 얘기를 하면서 맥주를 한병 정도와 보드카 한잔을 마셨다. 소독용 알콜을 마시는 듯한 느낌. 마시고 난 후 타는 듯한 고통이 식도를 시원하게 한번 쓸어준다. 다신 안 마셔야지.

크리스마스 파티

우리를 모으신 한국인 두 분과 얘기를 했다. 그분들은 내일 새벽 비행기로 이르쿠츠크를 뜨신다고 한다. 알혼섬의 바이칼이 얼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비행기를 변경했다고 한다. 알혼섬에 갔다 온 나는 자랑스럽게 사진을 보여줬다. '우와아아' 놀람과 아쉬움이 동시에 담긴 감탄사를 계속하신다. 역시 가길 잘했다. 혼자만 했다는 이기적인 뿌듯함을 그분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즐겼다.

12시쯤 돼서 잠시 침대에 가서 누웠는데 그대로 자버렸다. 오늘은 많이 피곤한 것 같았다. 그래도 메리크리스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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