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열차와 안녕!

이르쿠츠크 안녕?

by 조재현

2019/12/19
3일째의 열차 안은 자는 거 말고는 없다. 가끔 뜨는 3G도 이젠 거의 뜨질 않아 휴대폰 보는 것을 포기했다. 새벽에 잠시 깨서 두 시간 정도 사진 작업과 글을 쓰고 나면 자고, 햇빛 때문에 깨면 밥 먹고 자고, 오래 머무는 정차역에서 나와 바람 쇠고 사진 좀 찍다가 또 잔다. 3일간 갈아입지 않은 옷을 이제는 벗고 싶고, 떡진 머리와 면도하지 않은 수염도 이제는 깨끗하게 만들고 싶다. 그래도 괜찮다. 오늘만 지나면 새벽 3시에 나의 중간 종착지인 이르쿠츠크에 도착하니 말이다. 그런 들뜬 생각을 하며 다시 잔다.

시베리아 열차안 모습

열차에서 친해진 재환이와 유진이가 오늘은 나의 마지막 날이니 식당칸에서 술을 마시자고 한다. 나는 많이 못 마시니 맥주를 먹자고 했다. 저녁에 식당칸으로 갔다. 나와 유진이는 무난한 감자튀김을 시켰다. 재환이는 치즈가 얹어진 닭가슴살을 시킨다. 소문으로는 식당칸의 음식은 양이 심하게 적다는 걸 들었다. 가성비가 심히 떨어지는 음식들이 나왔다. 흠... 역시나. 맥주도 냉장고에 넣지 않은 것을 준다. 그래도 러시아가 추우니 맥주도 심하게 밍밍하진 않다. 내가 술을 먹지 못하니 한 캔만 먹고 20분만 지나니깐 얼굴이 달아올랐다.


뒷테이블에는 잘생긴 러시아 남자 둘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유진이가 관심을 보였다. 걔네들에게 말을 걸었고, 금방 친해진다. 재환이도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거라 같이 얘기하고 싶어 했다. 나는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내가 먼저 자리를 일어났고, 둘은 러시아 남자들과 술을 더 마시는 듯했다.

'치타'라는 도시의 역 앞에 있던 성당

돌아와서 자려고 하는데 낮에는 잘 오던 잠이 밤에 오질 않는다. 여러 번 뒤척였지만 허리만 아프다. 그냥 음악을 들으면서 숴야겠다. 두 시간 정도 그러는데 애들이 돌아오질 않는다. 뭔 일 있나 싶어서 식당칸으로 넘어갔다. 추운 열차 사이를 네 번을 지나고 승객칸보다 무거운 식당칸을 열었을 때 식당칸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서있다. 재환이의 동그랗게 된 두 눈이 나와 마주쳤다.
"형 아까 옆에 술 취한 새끼가 우리랑 놀던 러시아 남자애를 갑자기 주먹으로 쳤어요!"
엥? 뭔 소리인가? 큰소리가 안 나서 별일 아닌 거 같았는데 벌써 한바탕 한 것이다. 자세히 봤다. 재환이와 유진이 그리고 러시아 남자 둘이 있던 테이블에는 빈 보드카 몇 병과 약간의 먹다 남은 안주가 널브러져 있었다. 유진이는 술에 취해 약간 빨개진 얼굴로 아직 말싸움을 하는 러시아 남자애들을 걱정한다. 몇 분 동안 둘이 말싸움을 하더니 이내 화해를 하고 주먹으로 친 애가 맞은 애한테 술을 사준다.
"이제 그만 가자."
여기 더 있어봤자 좋을 거 없다는 생각에 둘을 데리고 우리 자리로 돌아갔다.
"형 이거 대박인데 블로그에 글로 쓰세요."
마음이 진정된 재환이는 내게 장난스럽게 얘기한다. 내가 안 겪은 거라서 써도 별거 없을 거 같은데.

창문너머로 보이는 광경. 연기나는 곳은 화력발전소라고 한다.

침대에 누웠다 나도 모르게 오던 잠은 휴대폰 알람 소리에 깨어났다. 미리 정리했던 짐을 다시 한번 정리했다. 가기 전에 깨워 달라고 부탁한 재환이와 유진이를 깨웠다.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40분 정도 정차하니 둘은 역 플랫폼까지 나와서 나를 마중했다. 잠에서 덜 깬 눈으로 그들은 내게 포옹했다. 한국에서 다시 보자고 서로에게 약속한다. 그리고 차가운 공기는 그들을 정신 차리게 했고 먹을 것을 사고 다시 기차로 돌아간다. 누군가는 도시에 머물고 누군가는 그곳을 떠난다.

열차 사이를 찍은거.많이 춥다.

미리 부른 막심(러시아의 카카오 택시 같은 것)으로 부른 택시가 왔다. 역으로 나와 출구를 바라보았다.
-11°C
시베리아를 지난 내겐 의외로 춥다고 느껴지지 않는 날씨다. 흩날리는 눈을 뚫고 택시에 탔다. 호스텔로 향한다.
이제 이르쿠츠크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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