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혼섬 가는 길

겨울 바이칼을 느끼자

by 조재현
바이칼 호수를 지나는 배

2019/12/21

자정이 넘어서 글과 사진 작업이 끝났다. 그제서야 옆에 있는 5명의 서양인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사진 작업에 흥미가 있었던지 사진을 보여달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얘기를 했다. 그들은 방에 있는 몇 명의 일행과 같이 여행을 왔다.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에서부터 말이다. 그중 캐나다의 국적인 스테파니 누님은 10년 전 강릉에서 영어교사로 일하셨다고 한다. 지금은 남편을 따라 이탈리아에 있는데 김치를 못 먹어서 미치겠다고 한다. 마트에 파는 볶음김치라도 주고 싶다.


그녀의 얘기가 끝나고 나의 여행 일정을 물었다.
"저는 러시아를 넘어서 핀란드 가서 오로라 본 다음에 유럽 찍고 산티아고 순례길 걷다가 3월에 한국으로 돌아가요."
"오우마이갓! 헤이 어텐션 플리즈! 여기 완전 멋있게 여행하는 친구가 있어! 다들 들어봐!"
내 얘기에 감동한 누님은 일행들에게 나의 일정을 큰소리로 말한다. 그들은 내게 '어메이징'이라고 연신 말하며 자세한 계획을 묻는다. 독일을 지난다고 하니 독일분들은 집에 재워줄 테니 자신의 도시인 뮌헨을 오라고 한다. 그들에게 주목받으니 기분이 꽤 좋다. 티 내지 않고 담담히 여행 얘기를 더 했다. 이렇게 담담하게 말하는 게 더 멋있는 거 아닌가. 우리는 새벽 2시까지 얘기를 나눴다.


아침이 되어 짐을 호스텔 창고에 맡기고 10시가 조금 넘어 알혼섬으로 가는 픽업차량이 왔다. 차에는 8명 정도가 탔는데 러시아 노부부와 여러 명의 중국인이었다. 중국인 중 3명의 무리가 내게 관심을 보여서 친해졌다. 중간에 휴게소를 들러 밥을 먹는 것도 함께 했다. 밥을 먹고 화장실을 갔는데 화장실 사용료를 내야 한다. 그런데 쓰는 돈이 가장 아깝다. 그냥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오줌을 눴다. 경치를 봤는데 하얀 풍경이 기가 막힌다. 이런 곳에서 소변을 본다는 게 참 뿌듯하다. 그렇게 4시간 정도의 롤러코스터 같은 길을 달려 선착장에 왔다. 호수가 다 얼면 차로 바로 갈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알혼섬으로 가는 도로에서 찍은거. 저걸보면서 소변을 봤다.


배로 호수를 지나 차는 달려 예약한 숙소에 왔다. 숙소가 다른 중국인 일행과 헤어지면서 내일 같이 알혼섬 북부 투어를 하기로 약속했다. 체크인하러 들어갔는데 직원이 내게 투어를 알려주면서 남부 투어를 추천한다. 지금 남쪽이 호수가 얼어 걸을 수 있다고 한다. 잠시 생각했지만 그냥 중국인 친구들과의 동행이 낫겠다 싶어 거절했다. 북부에 가도 얼음은 있겠지.

우리를 알혼섬까지 태워 준 드라이버아저씨


알혼섬에 오기 전, 사진동호회 네이버 카페에서 알혼섬에 있다는 무당 바위에서 찍은 야경을 봤다. 머무는 숙소 뒤편에 그것을 찍기 좋은 곳이 있다는 걸 알았다. 밤에 찍으러 가겠다.

밤 9시가 되었다. 위생봉지를 발에 넣고 양말을 신었다. 손에는 위생장갑과 장갑을 꼈다. 가지고 온 옷들을 전부 껴입고 나갔다. 구글 지도의 안내를 따라 길을 걸었다.(다음날 알고 보니 그곳은 호텔 뒤편이 아니었다.) 카메라 불빛에 의지해 눈 쌓인 언덕을 올랐다. 뒤에서 쳐서 누군가 나를 죽여도 아무도 모를 어둠이다. 하늘에는 눈이 세게 날리고 있다. 언덕 위에서 어둡지만 아주아주 희미하게 보이는 무당 바위를 찾았다. 사진 찍기 좋은 자릴 찾아 삼각대를 세우고 카메라를 야경 찍기 좋게 세팅했다.

몇 번 찍었는데 자꾸 맘에 안 들게 나온다. 눈이 내리니 구름이 하늘을 덮어서 별들이 먼지만큼만 나온다. 그래도 좋은 사진 찍어보겠다고 더 있기로 했다. 하지만 배터리는 추위 때문인지 금방 달았다. 여분의 배터리까지 다 썼다. 2시간 정도 있었다. 방에 돌아가 보정으로 살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언덕에서 내려왔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 왔을 때 반대편 멀리에서 한 사람이 가로등 불빛에 서있다. 그도 내가 걸어가는 걸 눈치챈듯하다. 내쪽으로 서서히 걸어오는 게 멀리서 보인다. 아까 했던 상상이 현실이 될 거 같아서 호텔 쪽으로 달렸다. 다리가 눈에 자꾸 들어가 높이 들면서 뛰었다. 어느 정도 지나니 그 사람이 갑자기 멈춰 선다. 그리고 차 한 대가 그쪽으로 오더니 그를 태우고 내가 온 길 반대쪽 멀리로 간다. 괜한 착각 했다.

그렇게 호텔에 도착하니 여기서 키우는 고양이가 와서 몸을 비빈다. 쉐키 귀엽네. 조금 만져주다가 발이 시려 방으로 들어가 이불속에 들어갔다. 발이 녹는데 따가웠다. 동상 전까지 간 듯했다. 발이 따뜻해지고 난 뒤에 사진을 보정해봤다. 살릴 수가 없었다. 헛수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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