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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모니블렌더 Dec 28. 2024

02. 나의 갭이어 프로젝트가 조용했던 이유

01. 유튜브를 오픈한지 두 달. 구독자는 70명에서 멈췄고, 마지막으로 업로드한 영상은 알고리즘을 타지 않았다. 뒤늦게 편집 오류를 발견하고 재업로드 했는데 설마 그것 때문인가? 아님 썸네일? 영상이 재미 없었나? 의문을 품고 잠시 유튜브를 멈췄다. 가족 이사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02. 시끌벅적 다섯 명의 가족 이사. 부동산 발품 - 대출 - 인테리어까지 장장 3개월이 걸렸다. 부동산의 ㅂ도 잘 모르는 내 유튜브 알고리즘이 ‘부동산’으로 가득차기 시작했고, 엑셀과 피그마를 총동원하며 회사 프로젝트를 하듯 몰입했다. 집을 구하는데 디테일하게 관여한 적은 처음이라 결혼하고, 집을 구하고, 살림까지 하는 친구들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덕분에 인테리어 잡지식도 많이 알게 됐다. 가장 힘에 부쳤던 건 ‘다섯 명의 의견’을 조율하는 일. 머리 큰 자식 셋이 다 컸다고 자기 주장을 하니, 데리고 사는 부모님도 머리가 아프셨을 거다. 회사 내 소통은 ‘남’이기 때문에 이성이 발동되지만, 가족과의 소통은 나와 남 사이 어딘가 있는 관계라 몇 번이고 감정이 유치하게 널뛴다. 이래서 스무살 때 독립을 하라는 걸까? 이사는 별 탈 없이 끝이 났다.


03. 문제는 다음이었다. 이사가 끝났는데도 여전히 과몰입 중인 나를 발견했다. 새벽 1-2시까지 쿠팡과 오늘의 집을 드나들었다. 벽지에 스크래치가 나거나, 타일에 뭐 하나 잘못 붙어있으면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거 누가 그랬어요....?(커진 동공)” 이상하다. 나 분명 P...인데 왜 이렇게 통제력이 강해졌지...?! 돌이켜보니 이사와 내 생활을 구분짓지 않고, 에너지를 100% 쏟아낸 내가 보였다. 장난처럼 말했지만, 진지하게 ‘하우스 매니저ㄹ’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집을 구했더니 이제는 깔끔한 수납템과 무드있는 아이템이 들어차있는 걸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04. 방치해둔 유튜브가 생각났다. 보관이사를 하면서도, 틈틈이 크리스마스 영상을 찍어둔게 있는데, 편집할 힘이 없었다. 영상 속 나는 지쳤고 따분한 바이브였다.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 지치다니.. 대체 언제 시작할래? 묻고는 빠르게 이사 모드로 돌아갔다. “1월 초까지는 집 정리를 해야지. 가구도 사야하고, 청소기도 알아봐야 하고, 러그 브랜드는 어디가 좋다더라 어쩌구저쩌구..“ 속시끄러운 변명을 했다.


05. 솔직히 터놓아볼까. 유튜브가 사치처럼 느껴졌다. 이사를 하며 큰 돈이 턱턱 지출되는 것을 보니, 속 편하게 유튜브를 찍고 있을 때가 아닌데..?! 하는 마음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퇴사 후, 틈틈이 쉬는 시간 외 맘편히 쭉 쉬지 않았다. 잔여 업무와 이사 등으로 3개월을 꽉 채워 보냈음에도 나는 왜 여전히 마음이 편하지 못할까. 어느 날은 나를 꽉 차게 응원하다가 또 어느 날은 빠르게 무언가 집중할 거리를 찾았다. 그게 ‘이사’였던 것 뿐이다.


06. 부모의 일을 덜어주고픈, 큰 딸래미로서의 책임감도 한 몫 했다. 9살, 11살 차이 나는 동생보다는 내 쪽이 나서서 책임지는 게 더 마음이 편하니까. 문제는 완벽주의가 하루에도 몇 번씩 툭툭 올라와 나의 예민함으로 가족을 괴롭혔다는 것이다. 이 집착을 어떻게 멈출까 하던 차에 ‘연말 회고 시즌’과 ‘스터디‘가 나를 붙잡았다. 덤으로 남자친구도 계속 물었다. ’유튜브 언제 또 올라와? 구독자 70명이다!’ 한 발 물러서서 내 환경을 다시 보니, 시도하고 싶은 것을 집중해서 할 수 있는 타이밍이 눈 앞에 와있었다. 변명 없는 세계로 나아가 ‘실행’만 하면 됐다.


07. 사실 이 글의 목적은 <구독자 페르소나>를 정리하기 였다. 근데 도무지 글이 써지지 않았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페르소나를 정리할 수 있을 때까지 글을 뱉었다. 신기하게 그 간의 과정을 기록하니 마음이 편해진다. 내 갭이어가 제대로 작동되지 못한 채, 멈추는 건 아닌지 내심 걱정했는데, 마침내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08. 스스로에게 다시 묻는다. 이 프로젝트 정말 하고 싶니? 강하게 YES!를 외치며 마음이 꿈틀댄다. 그래, 그렇다면 ‘다른 일’을 만들어 도망치지 말고 그냥 하자.


09. 연말이다. 그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해, 가족에게 고맙다고 꼭 표현을 해야겠다. 나 혼자 수많은 책임을 진 것처럼 행동해서 미안하다고, 따라줘서 고맙다고. 난 지난 회사 생활을 정리하며, 잠시 쉬는 동안 해보고 싶었던 것을 하나씩 해보겠다고. 그렇게 따뜻한 연말 인사와 나의 진짜 안부를 전하며 다음 챕터로 넘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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