갭이어 후, 다시 브랜드 기획자로
01.
안부를 전해요. 6개월의 갭먼스 이후 취업을 했습니다. 첫 이직, 첫 처우협의로 콩닥콩닥 떨렸던 때가 벌써 2달 전이라니 시간은 화살이 맞는가봐요. 어느 날은 쏟아지는 일로 정신이 아찔했다가 또 어느 날은 옆 동료의 다크서클을 보고 '저 친구도 분명 주말에 일했겠구나'싶어 서로 힘내자며 토닥이는 걸 보니 이미 새 직장에 적응 중인가봅니다.
02.
짧게 회사 소개를 하자면, 매년 1.5~2배씩 성장해온 회사입니다. 효율을 매우 중시하는 조직 문화이고요.
7년간 몸담았던 이전 직장과 비교했을 땐 정반대의 회사에 가깝습니다. 전 회사는 훌륭한 조직 문화를 갖췄지만 돈 버는 비즈니스모델이 늘 한 끗 아쉬웠고, 저 또한 리더로 있었지만 비즈니스 굴리는 법에 능숙치 않아 애를 먹었습니다.
그때의 아쉬움 때문일까요? 제 발로 정반대의 회사를 찾아 들어온 것이 신기했습니다. 오바 한 줌 보태자면, 운명처럼 느껴졌습니다. 덕분에 빡센 하루들이 눈 감아지는 매일을 보내고 있고요. 뭐가 맞는지 모를 때 반대로 달려가보라는 말이 있잖아요? 입사하자마자 '이곳은 속도가 빠른 조직이에요.'란 말을 동료들로부터 계속 들었는데 적당히 긴장되면서 챌린지 가득한 이곳에서 적어도 1년은 버텨보자는 마음이 벌써 드는 걸 보면, 어느새 회사와 정이 들어버렸나 봅니다. 기획자 소정님이 말했어요. 나는 지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걸까? 수습기간 내내 질문하겠지만, 제 직관을 한 번 더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03.
본격적으로 일 얘기를 해볼게요. 브랜드마케팅 리더로 '리브랜딩'을 메인 업무로 맡았습니다.
BI/BX 파트인 셈이죠. 회사는 어때? 일은 할만해? 물어오면 "효율을 중시하는 회사에서 리브랜딩을 한다는 건 챌린지에 가깝다."고 답합니다. 처음 입사했을 때 본사 직원의 1/2에게 자발적 점심식사를 신청했던 이유도 1차로 회사를 빨리 파악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었죠. 해당 업계에 발을 처음 들이미는 것이었기 때문에 말품을 통해 이 조직의 DNA를 빠르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이었습니다. 일이 잘 되게 하려면, 동료와 밥을 먹으며 마음을 나누는 것이 '일이 잘 되게 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 사실을 기획자 소정님께 배웠기 때문이죠.
점심을 집중적으로 먹었던 2주 동안 팀원들로부터 동일하게 들었던 얘기는 하나였습니다. '이곳은 속도가 빠른 조직이에요. 그만큼 변화가 많은 조직입니다.' 얼마나 속도가 빠르고 변화가 많으면 다 저렇게 말할까 싶었지만, 한 달만 흘러도 왜 그렇게 말하는지 단 번에 감지할 수 있었죠.
04. 아마도 이 조직에서는 속도와 변화에 얼만큼 잘 적응하며, 나의 일을 잘 바운더리치며 '진짜 성과'를 잘 만들어갈 수 있느냐가 관건인 것 같아요. 격동의 시기를 겪으며 성장하는 회사는 갑작스러운 의사결정이 수두룩하고, 방향성이 휙휙 바뀌는 등 팀원들이 혼란을 겪는 시기가 오는데요. (물론, 모든 회사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대표님의 '추진력'으로 회사가 빠른 속도로 이만큼 성장을 해왔지만 일관성 있게 나아가야 할 방향성은 무엇인지, 고객에게 어떤 메시지를 각인시킬 것인지, 몇 년 후 어떤 끝점을 그리고 있는지. 당장의 높은 매출을 내기 위한 단기적인 퍼포먼스 외,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며 장기적인 계획 하에 차근차근 퀄리티 있는 선택들을 해가야 할 타이밍이었습니다. 특히 제가 맡은 업무는 더더욱 기존에 해왔던 방식으로 자꾸 돌아가려 할 때, 진짜 무엇이 중요한지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는 일이었죠.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브랜드로 커갈 수 있게끔 '기획물'을 잘 쌓는 일. 그 과정에 있어 퀘스쳔이 생길 때 그냥 넘어가지 않고 꾸준히 지치지 않게 질문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05. 그래서 진짜 진짜로. '이직한 회사 어때?'라고 한 번 더 물으면
일단 어떤 어려움이 생겨도 1년은 잘 버텨내고 싶은 회사라고 답하고 싶어요.
입사 2개월 차이지만, 회사의 좋은 점을 적어볼게요.
① 옆에서 일을 배우고 싶은 리더들
제 위로 대표님, 본부장님, 실장님 등이 계신데 정말 육각형 인재같은 분들이 많습니다. 저 포함 각자의 장단이 있겠지만, 확실히 배울 게 많은 리더들이 조직에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입사했을 당시 1:1면접을 봤던 본부장님은 아마도 제가 가장 존경하는 리더가 될 것 같단 느낌이 드는데요.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면접썰을 주제로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회사의 DNA처럼 '효율'을 너무 중요하게 여기신 나머지, 면접 역시 어떤 틀을 부수고 편안하게 회사의 앞날에 대한 함께 고민하는 자리로서 면접을 리드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 외 대표님, 실장님 모두 자기 분야의 한 획을 긋고 계신 분들이라 직관/체계/비주얼 단에서 기획자로서 리더로서 또는 훗날 사업가로서(?) 다양한 감각을 배울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② 문제해결을 함께 하고 싶은 동료들
리브랜딩 과정 중, 가장 좋아하는 단계는 '인터뷰 시간'입니다. 대상이 대표님이라면, 이 브랜드의 시작이 어떤 뿌리에서 시작되었는지 가장 날것 그대로 들을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죠. 한 사람의 시작을 스토리로 듣다보면, 귀하지 않은 사업이 없습니다. 그 사람의 제 2 인생을 걸며 시작되는 스토리니까요. 그리고 각 사업이 성장하며 옆에서 붙어주는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또 각자의 이야기가 피어납니다. 어떤 욕구와 만족감 때문에 이 회사에서 이런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뭘 해결하고 싶은지 듣다보면 이야기에 푹 빠져 결국 다들 진심으로 자신의 일을 사랑한다고 느껴집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이 회사는 자신의 일에 대한 존경심이 있고,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최고의 복지는 동료라는 말처럼, 안도감이 느껴지는 말도 없는 것 같아요. 말이 길어지는데, 저희 팀/옆에 있는 팀을 보면 문제해결을 꼭 해내어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수 있도록 만들고 싶은 마음이 커집니다.
③ 원하던 회사 규모+매출
정확한 수치를 공개하긴 어렵지만, 약 200억 매출 규모입니다. 이 정도면 중소기업으로서 매출을 충분히 잘 내고 있는 회사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인력구조 역시 딱 제가 경험해보고 싶었던 구조였고요.
④ 쌓고 싶은 커리어 (리브랜딩 + 브랜드 기획 & 전략)
난다긴다 하는 중속기업은 이미 브랜딩이 탄탄하게 되어있는 곳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 규모에 브랜딩이 필수로 터치업이 필요한 상황인 경우는 조금 드물다고 생각했죠. 제안을 받고 합격한 회사라 솔직히 이렇게 취업해도 되나? 고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브랜딩~BI/BX까지 기획자로서 다시 한 번 A to Z를 할 수 있다는 건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정말 쉽지 않은 기회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입사하고보니 비즈니스 전략 파트가 꽤 크게 들어가는 범주였지만 '오히려 좋아!'를 외치며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⑤ IMC & 바이럴 포함 전방위적인 브랜드마케팅 경험
제가 속한 브랜드마케팅팀엔 IMC & 바이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브랜드의 일관된 메시지를 세팅 후, 온오프라인상 굵직한 고객 경험을 만들고 콘텐츠로 부지런히 소통하는 일을 합니다. 플레이어로서 모든 걸 세세하게다 경험할 순 없겠지만, 큰 그림을 계획하고 그 안에 돌아가는 마케팅 흐름을 더 깊게 볼 수 있는 포지션. 이전에도 대행사를 다니긴 했지만, 크게 커버할 수 없었던 영역을 인하우스에 들어와 더 디테일하게 보며 일할 수 있을 것 같아 무척 기대가 되는 부분입니다.
⑥ 인간의 기본 욕구와 관련된 사업 (Why 충족)
마지막으로, 내가 기획하고 마케팅하는 상품/서비스가 쓰잘데기 없는 것이 아니길 바랐습니다. 이왕 인생의 1/3 시간을 쏟을거라면, 내가 열렬히 첫 번째 팬이 되어 자신있게 이게 왜 세상에 필요한지 충분히 납득시키고 싶었죠. 삶 가까이에서 도움이 되는 일을 기획하고 싶었어요. 이 때문에 필수재를 해야하나 그런 고민마저 들었는데요. 다행히 인간의 3대 기본욕구에 들어있는 제품입니다.
06.
열심히 적고보니 회사에 다닐 이유가 무려 '6개'나 된다는 사실에 급 안도감이 몰려오네요.
(최근 이곳저곳 '급건'으로 생기는 일들이 하나둘 쌓여가고 있던 참이었거든요. 전사적으로 해당 문제가 더 급건이면 별 수 없지만 일을 위한 일이 되지 않도록 '우선순위'를 계속 질문하고 답을 찾아나가고 있습니다.)
07.
역시 기록을 해야할까봐요. 사람의 뇌는 부정적인 것에 먼저 반응하기 때문에 초심을 잃고 문제를 바라볼 때가 많죠. 내가 이 곳을 왜 오기로 마음 먹었는지. 무엇을 배우고 싶었는지. 주변에 얼마나 좋은 동료가 많은지.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 브런치에 들러 '일의 과정'을 기록해 보겠습니다. 차근차근 기록하다보면 우선순위대로 하나하나 풀어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