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달리기 농사

by 경쾌늘보


달리기 농부 3년 차


평생 다른 일을 하다가, 뜻하지 않게 농사일을 시작한 농부가 있다.

그 농부가 흙을 만지고, 땀을 흘리며 하루를 보내는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나의 달리기도 그러하다.


달리기를 참으로 싫어했던 내가,

뜻밖에 달리는 일을 시작한 지 어느덧 3년.

3년간 달리기를 시도하면서,

달리기 전에는 상상조차 못 했던 삶의 지도가 하나씩 그려진다.


농사처럼 정직하고 몸을 사용하고 땀을 흘려야 하는 달리기,

나는 스스로 달리기 농부라 부른다.


3년 차는,

회사에서는 대리급이 되어 일에 탄력이 붙을 때고

결혼에서는 서로가 어느 정도 알아가는 시기,

이민에서는 아직 어설픈 외국인에서 로컬을 조심스레 알아갈 연차이다.


달리기에서는 여전히 헤매고 있다. 나로서는.

그래도 멈추지 않는다면 4년 차 5년 차에 나아질 수 있는 때인 것 같다.



25년 달번기


농번기처럼 달리기에도 바쁜 시즌이 있다. 농한기를 맞기 전까지 말이다.


올해에는 주말 함께 달리는 달벗이 생겼고,


지역 10Km 달리기를 통해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을 더 가까이 볼 수 있어 좋았다.


한국에서 온 친구나 가족들과 달리기를 함께 하는 특별함을 즐겼고,


토요일 파크런에서 탐나던 25회 보라색 티셔츠를 드디어 득템 했다.


마라톤 핑계로 딸과 둘이 멜버른 여행을 할 수 있어서 기뻤다.


생일에 맞춰 뉴욕에서 버츄얼 뉴욕 마라톤 메달이 배달되어 서프라이즈!


쉰다 하지만, 그 와중에 크리스마스 모닝런을 할 수 있어 행복했다.


25년 1,000Km를 조금 넘기며 마무리하게 되었다.




25년 달한기


25년 10월 말, 마지막 풀코스 마라톤을 마쳤다.

나에게는 3번째 풀코스 마라톤이었다.

이것 또한 상상도 못 한 일 중 하나이다.


나는 대단한 마라토너가 아니다.

한 달 마일리지가 200Km 이상 된다고 뽐낼만한 것도,

빠른 속도를 자랑할 것도 없는

느린 마라토너이다.

그래도 부끄럽지 않은 것은,

어느새 나 자신을 '마라토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농부가 농번기의 수고를 마치고 농한기를 가지듯

11, 12월은 스스로 '달한기'로 정하고 다리를 쉬어 주었다.

농한기의 농부는 쉬기도 하고 장비도 정비하고 땅을 고르고 봄을 준비하겠지?

달한기의 러너는 쉬며 내년 달리기도 생각하고,

러닝화 세일에 술렁이기도 한다.



달리기라는 철문


달리기는 나에게 기록이나 성취라기보다 문을 여는 일이다.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은 문에게 다가감이었다.


"저 문을 연다고? 저게 열린다고?"

처음에는 웃음이 났다. 어이가 없어서.


역시 안 열리는 것 같고,

내 시도가 무모해 보였다.

아주 조금씩 밀어보면

미미한 틈이 생긴다.

틈새로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들도 다가온다.


달리기라는 무거움

글쓰기라는 새로움

마라톤이라는 벅참

이민자라는 막연함

취업이라는 두려움

중년이라는 모호함


틈이 생기면,

차츰 열리고,

조심스레 만지며

밀고 나간다.


두렵기만 했던 부분들도

쓰다듬을 수 있다.


지금도 웃음이 난다. 꿈을 꿀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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