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알라의 안녕을 바라며
뭐가 좋다고
말씀이 많지 않았던 나의 아버지의 젊은 시절, 피곤한 업무에도 불구하고 시간 나실 때 유일하게 보시던 프로그램은 '동물의 왕국'. 가족 중 아무도 공감하지 않지만 혼자 껄껄 웃으시고 얘기하셨던 뒷모습이 떠오릅니다. "동물이 뭐가 좋다고, 뭐가 재미있다고." 동물의 세계가 지켜볼 만큼 재미있다는 것인가. 그때 들었던 생각들입니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에도, 요즘의 저는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산책로로 갑니다. 길에는 큰 나뭇가지들이 떨어져 있고 눈을 뜨기도 어려울 만큼 바람이 붑니다. 강한 바람에 나뭇가지가 몸으로 떨어지는 확률에도 불구하고, 코알라 녀석들이 나무에서 잘 버티고 있을지 몹시 궁금해서 꾸역꾸역 멈추지 않습니다.
거센 바람이 흔드는 나뭇가지 사이에 코알라들은 몸을 꼭 끼우고 잘 자고 있습니다. 그들의 안녕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에 피식 웃음이 납니다.
"코알라가 뭐라고. 이게 그렇게 궁금할 일인가?"
혼자 멋쩍기도 하고 어린 시절 동물의 왕국을 보며 웃으시던 아빠의 모습도 겹칩니다.
아마도 저의 아이들은 후에 그렇게 기억하겠죠?
"우리 엄마는 나무들이 무섭게 흔들리는 날에도 코알라 보겠다고 혼자 나갔다 오곤 하셨지. 뭐가 재밌다고."
내 안의 다정함
더운 여름이면 물이 고파 내려오고, 밤에 기웃기웃 왔다가 사람의 손길을 두려워하지 않는 코알라.
어느 날은 엉덩이를 저의 발에 올려놓고 한참을 떠나지 않는 코알라.
어느 날엔 뒷마당의 철사 펜스를 손으로 벌려 구부려 뜨려 놓는 헐크 버전의 코알라.
낯선 이의 존재에 으르렁거리거나, 이빨을 보인다거나, 털을 세우거나 물지 않는,
그저 무구한 그들의 움직임은 무심하게 사는 도시의 사람들에게 작은 감동을 줍니다.
그 느린 발걸음이 일상처럼 느껴지다가도, 어느 해 온 숲이 검게 타버렸던 계절을 떠올리면 코알라들의 살아 움직이는 장면들은 이전보다 훨씬 또렷해집니다. 산불과 가뭄이 지나간 자리, 그럼에도 나무 위에서 여전히 작은 숨을 쉬고 있는 코알라들에게 눈길이 더 갑니다.
그토록 코알라를 반가워하는 이유는, 내 안의 다정함을 깨우는 것 때문일지 모릅니다. 낯선 사람들과의 교류나 저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경직된 표정이나 긴장감으로 아마도 잊고 살았던 것, 다정함. 나이 들수록 몸이 경직되듯 마음도 경직된다고 하는데, 적어도 다정함을 연습하며 경직시키지 않는다면 하는 바람이 함께 생깁니다. 대상이 누가 되었든, 쉽게 판단하고 선 긋지 않고 다정함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이길요.
코알라를 바라보면 미소가 먼저 지어지고, 멈추어 안부를 묻게 됩니다. 주머니 속에 묻어두었던 어떤 것을 슬쩍 꺼내 보게 됩니다. 그 순간 저는 조금 덜 경직되고,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살갑게 되어 다정함을 연습하게 됩니다. 코알라 세권에 산다는 것은 가끔 나무 위를 올려다볼 이유가 생긴다는 뜻이었습니다. 처음엔 그저 신기한 존재로만 여겼지만, 익숙해지면서도 오래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제게 허락된 작은 특권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방해나 제약 없이 볼 수 있었으니 말이죠.
나무 위, 다정함 버튼
관찰은 생각보다 오래 보는 일이었고, 오래 머무르다 보니 내 안에서 굳어 있던 것들이 조금씩 풀렸습니다. 굳었던 표정과 생각 그리고 발걸음들이 서서히. 그리하여 나는 누구에게나 쉽게 다정함을 내보일 수 있는 사람이 되지는 못하지만, 주머니 속 다정함 버튼을 꺼내 한 존재에게 조용히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창한 변화는 아니고, 세상을 바꾼 것도 아니지만, 자연 속의 한 무해한 존재와 서로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같은 동네의 공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가끔 생각합니다.
다정함을 유발하는 코알라와 이웃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분노나 우울을 유발하는 소식들이 많은 세상에,
어디 한 곳쯤 다정함을 꺼낼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꽤나 괜찮은 일입니다.
오늘도 숲길 곳곳에 숨겨진 다정함 버튼을 찾아 걷습니다. 한 주 동안 묻어두었던 시간들을 길 위에 내려놓고, 고요히 나무 위를 바라보며 서로의 안부를 느끼는 순간을 기대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