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
지난 5월, 신용점수가 600점대로 회복되었다. 그것을 기회삼아 제1 금융권에서 700만 원의 대출을 받았다. 금리는 8.7%. 리볼빙 이자에 비하면 천사 같은 수준이었고, 대출을 받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당장 해결해야 할 카드대금을 납부하고, 남은 돈으로 리볼빙 금액 절반을 냈다. 1000만 원 가까이 밀려있던 카드대금이 500만 원으로 줄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절대, 리볼빙 금액을 키우지 않기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결심은 실패했다. 소비습관을 고치지 못한 상태로 리볼빙을 절반만 줄여놓는 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예전만큼 무턱대고 뭔가를 사들이지는 않았지만, 툭하면 배달 어플을 켜는 건 일상이었고 페어참가를 위한 투자에는 늘 아낌없이 썼다.
'예산을 짜고 그만큼만 쓰면 되는 거 아니냐'라며 답답함에 한숨 쉬는 분들의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그러나 소비력이 충만한 분들 중에는 내 마음을 알아주시는 분도 계시지 않을까 기대를 걸어본다. 예산은 예산일 뿐,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는 걸. 업무에 관한 일이나 다른 것들은 완벽을 추구하며 나 자신에게 엄격한 경우가 많지만, 소비만큼은 그게 잘 되지 않는다.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기보다 완벽함에 있어서 돈이 우선순위가 아니랄까.
예산을 짜지 않고 일을 벌인적은 딱 한 번. 그 후로는 미리 계산을 해보긴 한다. 그런데 일을 진행하다 보면 자꾸만 필요한 것들이 늘어난다. 조금 더 브랜드답게 보이기 위해서 이것저것 신경을 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지출은 늘어난다. '예산은 그러라고 짜는 게 아니다. 미리 계획한 금액에서 넘지 않도록 하는 게 맞다.' 어디선가 원성이 들리는 것 같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분위기와 콘셉트에 진심이었던 나는 '이 정도로 타협하고 끝내는 것'을 할 바에는 하지 않는 편이다. 이미 시작하기로 마음먹었고 발을 담갔으니 어떻게든 내가 원하는 완벽에 가깝도록 밀어붙여야 하는 사람이다,라고 핑계를 대본다.
그림인쇄에 생각보다 큰돈이 들지 않는다는 것도 한몫했던 것 같다. 작은 지출이 모여 큰돈이 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조금조금씩 계속해서 뭘 만들어냈다.
2024년 11월, 첫 페어에 참가한 이후에 2개월 만에 다른 페어를 참가하기로 일정이 잡혀있었다. 멋모르고 참가했던 첫 페어에서 남은 재고는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그것도 뭘 몰라서. 한 번의 참가로 모든 사람들이 내가 어떤 그림과 상품을 파는지 알 거라는 생각과 새로운 걸 기대하고 있을 거라는 착각 때문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새 그림을 그리고 새로운 포스터와 엽서, 제품 몇 가지를 추가로 만들었다. 거기에 더해 새로운 진열대도 추가로 마련했다. 첫 페어에서 강하게 남았던 아쉬움을 만회하고 싶었다.
이때 얼마나 더 들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른 페어보다 참가비가 적었다는 이유로 마음껏 보태 썼던 것 같다. 아마 200 만원은 가까이 썼을 거다. 그것도 할부로. 그리고 매출은 첫 페어보다 적었다. 또다시 100 만원 이상의 적자를 본 거다. 나는 거기에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 더 브랜드처럼 보이고 싶었고, 더 의미 있는 제품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재고처리 명목으로 2025년 9월, 세 번째 페어를 참가했다. 그때의 매출은 참가비보다 적었다. 그리고 12월,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서 더 큰 페어에 참가를 했고 역대 최저 매출을 찍었다. 고백해 보자면 이때, 새로운 콘셉트로 참가하겠노라 결심하고 인테리어 소품을 싹 갈아엎느라 많은 돈을 썼다. 실험적이었던 만큼, 실패를 맞이했다.
2년간 네 번의 페어 참가를 했고, 매번 적자를 봤다. 할부로 제품을 만들고 페어에 참가한 후, 할부를 메울 수 없는 결과를 냈다. 그래서 리볼빙 이자와 함께 몇 달동 안이나 카드값에 허덕였고, 살만하다 싶으면 다시 페어에 나가서 같은 결과를 만들었다. 그 사이에 리볼빙 금액은 야금야금 늘어났고, 어느 날 보니 대출을 받기 전과 비슷한 상태가 되어있었다.
사실 마지막으로 참가했던 페어를 제외하고는 '페어참가'가 유일한 목적이었고, 목표였다. 얼마큼을 투자해서 얼마큼을 벌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없었고, 그에 걸맞은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게 지난 2년간의 실패로 배운 점이랄까. 그리고 또 하나 알게 된 사실, 리볼빙은 곰팡이라는 점. 애초에 뿌리 뽑지 않으면 다시 늘어나는 곰팡이. 700 만원의 대출금을 절반도 갚지 못한 채, 리볼빙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