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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owReader Aug 19. 2023

달리기는 정직하다

세 번의 하프마라톤 완주 감상


롱비치 하프마라톤        3:31:37               
서프시티 하프마라톤     2:36:53               
OC 하프마라톤            2:28:12                        


달리기를 시작하고 세 번 참가한 마라톤 기록이다. 무릎 통증이 두려워  감히 뛴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던 내가 작년 8월 중순에 달리기를 시작했다. 뭣에 씐 지는 몰라도 어느 날 덜컥 마라톤 클럽에 가입했다. 살살 걷뛰 (걷고 뛰기)부터 시작하여 일 년이 채 안 된 지금까지 세 번의 메이저 비치 마라톤 대회에 출전했다. 이는 비록 하프 마라톤이지만 걸음마만 겨우 떼던 어린아이가 뛰는 정도가 아니라 날아다니게 된 것과 맞먹는 성취라고 해도 결코 과장은 아니다. 재능 없이 노력만 한다고 가능한 게 세상에 얼마나 되나. 운동에 재능이라곤 1도 없는, 몸치의 여왕 중 상 여왕인 내가 순전히 꾸준한 연습과 노력만으로 해냈다는 증거이기에 소중한 기록이다. 노력 한 만큼 딱 고만큼 보여주는 달리기는 너무 정직하다. 


롱비치 Long Beach  OCT 9, 2022

달리기를 시작한 지 2개월도 채 안 되었을 때 마라톤이란 게 꼭 뛰어야만 되는 게 아니라는 새롭고도 경이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녀노소 불구하고 클럽 회원들 거의 다 참여한다길래 어떤 건가 경험도 해보고 싶고, ‘걷는 거야 오랜 세월 해왔으니..’ 하고 살짝 쉽게 생각하기도 한 것 같다. 넘어지는 불상사만 없었다면 그럭저럭 첫 마라톤 치고 할 만했다 했을 텐데..  그렇다. 중간 지점 어디쯤에서 넘어졌다. 넘어지던 그 순간은 지금도 슬로우 모션으로 기억이 생생하다. 타자가 안타를 치고 달리다 팔을 뻗어 슬라이딩하며 베이스를 터치하는 딱 그 자세로 나도 왼팔을 길게 뻗고 허우적거리다 좌악 미끄러지며 넘어졌다. 젊은 나이였으면 아픔보다 쪽팔림이 더 해서 벌떡 일어났을 텐데 이제 내 나이는 창피한 거보다 놀래서 어디 하나 부러진 게 아닌가 싶어 꼼짝도 못 했다. 잠시 숨도 멈춘 것 같아 그대로 한참을 누워있었던 것 같다 (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몇 초도 안되었을 것이다) 친절한 주위 러너들에게 부축을 받아 가며 겨우 일어나니 왼팔 뒤꿈치가 까져서 피가 나는 것 외에 움직일만했다. 구급의료 대원 기다리네 마네 이래저래 한 30분 이상 지체하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첫 마라톤을 넘어지는 바람에 포기했다는 불명예를 남길 순 없지 않은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로오오오옹 비치를 걷다 뛰다 비틀거리며 완주. 완주 시간 3시간 31분 37초


서프시티 Surf City (Huntington Beach) FEB 5, 2023

롱비치 이후 무릎 통증과 넘어진 왼쪽 갈비뼈 부위의 통증으로 한동안 뛰지 못해 혹시 영 영 못 뛰게 되는 건 아닐까 얼마나 걱정이 되든지 (팀원들 중에도 족저근막염-나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병명이었다-이라든가 무릎의 연골이 다 닳아 아예 뛰기를 포기해야만 하신 분 몇몇 분이 계신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니 차차 나아져 연말에 일주일 휴가 동안 매일 새벽 달리기를 했다. 선배 러너에게 특별 트레이닝을 받으며 살살 뛰다 보니 재미가 붙었다. 계속해서 1~2분 뛰는 것도 힘들었는데 30분, 한 시간씩 뛸 수 있게 되니 어찌나 신기하던지, 신나서 더 열심히 뛰고, 뛰니까 더 잘, 오래 뛰게 되고.. 또 뛰고… 뭔가 힘든 일을 재미있어서 스스로 열심히 한건 내 평생 처음이지 싶다. 1월엔 달리기 북클럽 ‘꿈꾸는 러너’와 콜라보 한 김성우 작가님의 마인드 풀 러닝에도 조인했다. 작가님의 오랜 달리기 경험 인사이트도 얻고 함께하는 사람들의 에너지와 시너지 힘을 받아  더 더 열심히 뛰었다. 실력이 쑥쑥 향상되는 게 스스로도 알겠고 다른 사람들 눈에도 띄었다 그러다 보니 슬금슬금 걷지 않고 끝까지 뛸 수 있을까? 해 볼까?  해보자!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오래전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What I Talk About When I Talk About Running>를 읽을 때 본 그가 미리 써놓았다는 묘비명이다

Haruki Murakami 1949~20**
Writer (and Runner)
At Least He Never Walked

묘비명에 써넣을 정도로  ‘걷지 않고 끝까지 달렸다’를 얼마나 자랑을 하는지 부럽기도 하고 어떤 기분일지 궁금도 하고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때의 나는 전혀 달리기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어서 그러다 말았는데 작년에 꿈꾸는 러너 북클럽에서 이 책을 다시 읽고, 내가 실제로 달리기를 하게 되니 혹시나 나도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 도전하고 싶어졌다. 이번 마라톤은 아주 천천히 달릴지언정 적어도 걷지는 말자는 목표를 가지고 달렸다. 심지어 water station에서도 속도를 줄일 뿐 걷지 않았다.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코스라 지루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옆에 바다를 끼고 달리는 이 코스가 좋았다. 바다 냄새와 파도 소리, 시원한 바람, 조금씩 흩뿌리는 빗방울을 얼굴에 맞으며 뛸 때는 가슴이 벅차올라 내가 정말 달리고 있는 게 맞는지, 꿈은 아니겠지 싶었다. 하지만 이런 황홀함은 딱 절반까지만. 나머지는 왜 내가 내 돈 내고 사서 고생인가 이게 정말 나를 위한 일인 게 맞나 싶어 후회막급이었다. 머리가 하얘지며 아무 생각도 안 나고 힘들어서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은데도 몸과 다리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듯 마치 태엽감은 자동인형처럼 저절로 움직이는듯했다. 원래 엄살이 심하고 육체적 고통에 취약한데 꿍시렁 꿍시렁거리면서도 끝까지 달린 게 신기했다.  At least I never walked! 완주 시간 2시간 36분 53초


OC (Orange County - Newport Beach) MAY 7, 2023

OC 마라톤은 스타트와 피니시가 같았던 전의 두 마라톤과 달리 시작과 끝이 다르다. 피니시 지점에 차를 주차시키고 깜깜한 새벽에 단체로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시작 지점까지 간다.  뉴포트 비치 유명 명품 쇼핑몰인 패션 아일랜드부터 시작하여 일 년에 이날 딱 한 번 퍼블릭에게 오픈한다는 비치 부자 동네 골목을 지나 바다로 나와 바다를 끼고돌아 OC 페어 장소에서 끝이 난다. 많은 사람들이 세 비치 코스 중 이곳이 제일 아름답다고 꼽는 코스이다. 


어느새 지난번에 완주하느라 힘들었던 건 싸악 다 까먹고 이번 경기는 목표를 2시간 30분 안에 들어오는 걸로 해볼까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두어 달 만에 6분을 당기는 것은 하늘에 별 따는 것만큼 힘든 일일 줄 그때는 몰랐다. 나 같은 초보자는 첨부터 느리게 천천히 뛰며 페이스 조절을 잘해야 후반에 지치지 않고 힘내어 뛸 수 있다. 스타트라인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알같이 튀어 나가기 때문에 이 열기에 휩쓸려 나도 모르게 빨리 뛰게 되지만 배운 대로 일부러 뒤처지면서 나 혼자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지난번에도 그렇고 클럽에서 같이 참여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뛰게 된다. 함께여도 결국엔 혼자 가야 하는 길이 우리 삶과 비슷해서 참 좋다.) 기록에 연연해하지 말고 계속 천천히 뛰었다면 덜 힘들었을 것을 어쨌든 해보기로 한 거니 시도는 해보아야 했다.  중간 이후부터 더 속력을 내려고 하다 보니 경치고 뭐고, 부자 동네고 바다고 하나도 눈에 안 들어왔다. 한 3 마일쯤 남았을 땐 그냥 그 자리에 팍 주저 않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또 내가 미쳤지, 왜 사서 고생이야 하며 후회막급인데 응원하던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외치는 게 들렸다. ‘Go Theresa! You can do it! Almost there!’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러너 가슴에 붙은 Bib에 깨알같이 쓰인 이름을 불러 끝까지 뛸 수 있는 힘을 실어주는 이런 사람도 있다. 구경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지도 않은 마라톤을 보자고 나와서 모르는 사람 이름을 불러주는 그 마음에 나의 힘든 몸은 더 울컥하여 용기 내어 포기하지 않고 완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완주 시간 2시간 28분 12초 


세 번의 하프 마라톤을 완주한 지금 이제는 안다. 아무리 죽을 것 같이 힘들어도 피니시 라인을 지나 메달을 목에 걸고 주최 측에서 제공하는 바나나, 우유, 에너지 드링크 등등을 하나씩 집으며 걸어가다 보면 5분도 채 안 되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는 걸. 포기하지 않고 달렸기에 이 자리에 와있다. 그 순간 마주하는 나 자신이 쫌 기특하고 죽을 때까지 데리고 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달리기를 시작 한지 곧 일 년이 되고 시월에 다시 롱비치 마라톤을 뛸 것이다. 이번에는 같은 시간 안에 들어와도 죽을 둥 살 둥 뛰는 것이 아니고 끝까지 경치도 보고 여유롭게 즐기며 뛸 수 있기를 목표로 하며 오늘도 신발 끈 묶고 밖으로 나간다. 타고나야 하는 재능도 특별히 오랜 세월 연마 해야 하는 스킬도 별로 필요 없이 매일 꾸준히 밖이든 트레드 밀이든 어디서든 달리기만 하면 노력한 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큰 보상을 주는 이 정직한 달리기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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