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부터 애늙은이같은 아이였는데, 고스란히 전해지는 부모의 고통과 슬픔을 느끼며 빠르게 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들은 내 세상의 전부였고, 내 우주였으니까.
초등학교 1, 2학년 정도로 기억한다. 우리 아파트 단지 안에는 ‘맘모스‘라는 상가가 있었는데, 거기서 엄마랑 장을 보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엄마가 빨간색 장지갑을 열어 보면서 한숨 쉬었다. “월급날이 며칠 전이었는데 벌써 돈이 없네…”
엄마의 심각한 표정에 우리 집이 망하는건 아닌지, 빠듯한 형편이 걱정되어 그날 밤 나는 잠을 설쳤다.
부모님의 갈등과 냉전, 그리고 곧 시작된 언니의 사춘기와 반항까지 겹쳐져 집안 분위기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활화산같았다. 어린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으니 나는 요리조리 눈치를 살폈다. 그저 집안이 평안하기만 하다면, 더 바랄게 없었다.
부모님의 말 한마디와 감정변화에 민감한 아이, 집안 분위기에 지나치게 신경쓰는 아이였으니 그들이 기쁘면 나도 기쁘고, 그들이 슬프면 나도 슬펐다.
혈기왕성했던 젊은 시절의 부모님은 갈등의 골을 숨기지 않았고, 한번 폭발하면 몇 주는 집안 분위기가 얼음장 마냥 차가웠다. 엄마는 잘 들어주는 딸의 위로가 힘이 되었는지 나를 친구삼아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을 늘 털어놓았다. 그런 말을 들을때마다 나는 엄마가 너무 안쓰럽고 공감이 되어 위로해주었다. 속은 무너졌지만 겉으론 친구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어린 나에게는 풀기 너무 어려운 숙제였으니 마음은 늘 답답했다.
신기하게도 이러한 가정 분위기가 공부에는 도움이 되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준 것이다. 내가 1등을 하거나 백점을 받아오면, 냉랭하던 분위기가 풀리고 부모님의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면 집안이 화목해지는 듯 했다. 내가 살길, 그리고 우리가 살길은 바로 공부인 것인가.
학생인 내가 집안의 냉랭함을 풀수 있는 길은 오직 공부라고 생각했다. 동기가 묵직하고 목표가 확실하니 엄청난 추진력으로 공부했다. 유일한 살길이라는 절실한 생각으로 하는 공부는 집중력과 효율이 컸고, 자연스레 그만큼 성적도 잘 나왔다. 그렇게 목표한 대학으로 진학하는 행복을 누렸지만 곧 엄청난 무기력에 빠졌다.
대학을 진학한 후 점점 마음이 바닥을 치며 힘들어지자, 단지 내가 진로를 제대로 찾지 못해서 그런 줄 알았다. 사춘기가 늦게 왔다고만 생각했다.
한달에 한 번씩 본가에 내려가서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혼자가 되면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나왔다. 그럴때도 단순히 부모님이 그리워서, 아쉬운 마음에 눈물이 난다고만 생각했다. 알고보니 나의 혼란스러운 마음과 눈물은 그리움이 아니었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터져 나올 집안의 불행을 막지 못한다는 무력감, 즉 '중재자의 퇴근 불가능한 불안'이었다.
그렇게 30대 초반까지 나는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방패였고, 아빠와 언니에겐 회유자였다. 내 인생의 페이지는 비어있는데, 남의 인생을 대신 써주느라 펜 끝은 늘 닳아 있었다. 문제는 내가 사회 구성원이 되면서 스스로 감당해야할 인생의 무게가 늘어나면서 나타났다. 사회에서 깎이고 부딪히며 견디기에도 에너지가 부족한데, 엄마는 여전히 매일 나랑 얘기하면서 본인의 어려움을 공유하고 위로받고 싶어하셨다. 점점 엄마와의 통화가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성인이 되고 객관적인 시선이 생기면서 더 이상 한쪽 부모님 편만을 들수가 없어졌고, 개입하고 싶지 않아졌다는 거였다. 예전에는 엄마의 시각에서 듣고 공감했지만, 사실 그때도 나는 아빠를 무척 사랑하는 아빠의 딸이기도 하기에 마음이 참 힘들었다.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성숙해지자 부모님 각각의 장단점이 보였고, 둘의 관계는 본인들의 선택과 책임이지, 자식인 내가 매번 알고 중재하는 건 못할 짓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취업을 준비하던 20대 후반, 처음으로 서울의 한 심리상담 센터 문을 두드렸다. 당시 집안은 폭주하는 언니와 그 화살을 온몸으로 맞으며 내게 전화를 거는 엄마 사이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다. 엄마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심장이 조여왔다. 언니는 과거의 상처를 명분 삼아 가족들에게 분노를 쏟아냈고, 나는 그 사이에서 살얼음판을 걷는 중재자가 되어 미쳐가고 있었다.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아 찾아간 상담실에서 선생님은 뜻밖의 처방을 내렸다.
“그건 그들의 고통입니다. 어머니에게도 당하지 않고 살 방법이 있어요. 단호하게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죠. 하지만 어머니가 그러지 않기로 선택했다면, 그건 어머니의 책임입니다. 이제는 그들이 아닌, 본인의 삶만 신경 써야 할 시기예요.”
머리로는 완벽히 이해했지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 속에 있다는데 무심해지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나는 다시 그 짐을 짊어지는 쪽을 택했고, 똑같은 비극은 몇 년간 반복됐다. 그리고 작년, 나는 마침내 완전히 넉다운됐다.
내 삶을 지탱할 에너지가 바닥나자, 더 이상 엄마의 하소연을 예전처럼 공감하며 들어줄 여력이 없었다. 결국 나를 지키기 위한 냉정하고 아픈 말들이 튀어나갔다.
“엄마, 이제 엄마 문제는 엄마가 해결해. 나도 너무 힘들어. 이런 말 듣는 거 이제 버겁고 괴로워.”
엄마는 내 절규를 이해하기보다 딸에게조차 위로받지 못한다는 서운함에 매몰된 듯 보였다. ‘내 어깨 위의 짐을 이제 좀 내려놓을게, 각자의 짐은 각자가 지자’라고 말하는 딸이 낯설고 야속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러다간 우리 모두가 주저앉아버릴 텐데.
당신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었던 그 지극한 마음은 여전히 내 안에 자리하고 있다. 가족의 안녕을 바라는 그 간절함 또한 변함없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들이 마땅히 겪어내야 할 삶의 무게를 내가 대신 짊어지는 것은, 결국 그들에게서 자생(自生)의 기회를 뺏는 일일 뿐이었음을. 그 사이 정작 나의 영혼은 속절없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눈물을 삼키며 씩씩한 척 걸어가는 딸의 뒷모습을 끝내 지켜봐 줄 수 없다 해도, 그 서운함마저 이제는 그들의 몫으로 남겨두려 한다. 슬프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나만의 방식으로 나와 가족을 지켜내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이제는 그동안 뒷전으로 밀려나 있던 '나'를 가장 먼저 앞줄에 세워주려 한다. 꽁꽁 얼어붙은 내 마음을 남의 손이 아닌 내 손으로 직접 안아주고 녹여줄 것이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마음을 놓아도 된다고, 너는 충분히 잘해왔다고.
개와 늑대의 시간, 황홀한 핑크빛 노을을 보며 혼자 조용히 읊조린다.
“All is 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