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애가 바사삭

by 서하

자영업을 하다 보면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소중히 간직해온 인류애가 '바사삭'하고 무너지는 경험을 숱하게 하게 된다.


학원에서는 아이만 보내고 수업료는 주지 않는 부모들이 심심찮게 있었다. 학원 특성상 한 달 수업료를 선결제해야 수업이 제공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아이만 계속 보내놓고 결제일이 되면 슬그머니 입을 씻는다. 카드를 보내는 걸 깜빡했다느니, 결제 링크가 안 된다느니 요리조리 핑계를 대며 미루다가 결국 연락 두절이 되기도 한다. 부모는 전화를 받지 않는데 아이만 천연덕스럽게 학원에 나오는 상황.


아무것도 모른 채 교실에 앉아 있는 아이를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이를 붙잡고 돈 내라고 다그칠 수도 없으니 참으로 난감하다. 아이에게는 티 내지 않고 수업을 진행하려 노력하지만, 나는 무료 봉사자가 아니다.

당연한 대가를 달라고 구걸하듯 말해야 하는 순간, 나는 교육자가 아니라 채권자가 된 것 같아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자식 성적 올려달라는 권리는 누구보다 당당하게 주장하면서, 정작 의무는 제때 하지 않는 상습적인 이기심을 마주할 때면 ‘참으로 사랑하기 힘든 사람이구나‘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든다.



카페에서는 훨씬 더 다채로운 인간 군상을 만난다. 오늘도 나의 인류애를 시험하는 집단을 마주했다.


스무 명 가까이 되는 단체가 우르르 들어왔는데, 전략인지 우연인지 대여섯명씩 따로 들어와 나눠서 결제를 한다. 그러고는 주문한 그룹끼리 앉지 않고 이 그룹 저 그룹 섞여 앉으며 카페를 점령한다. 이렇게 되면 주문 구분이 굉장히 헷갈려서 정신이 없는데다, 들어온 인원에 비해 주문한 음료가 부족해도 체크가 어렵게 된다.

인원수보다 최소 다섯잔은 적게 주문했지만 짐짓 모른 척 넘겨주었다.


음료를 다 만들어 내보내고 정리하고 있는데, 한 아저씨가 다가와 따지기 시작한다. 분명 자기 옆 사람과 본인 몫으로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켰는데 왜 한 잔만 왔느냐는 것이다.

나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나눠서 들어오시고 자리를 계속 옮겨 앉으셔서 정확한 구분이 어렵지만, 결제된 총 13잔은 이미 다 나갔다고. 아마 일행 중 누군가 주문하지 않고 한 잔을 가져가신 것 같다고.


그러자 아저씨는 눈을 부릅뜨며 그건 아가씨 사정이고, 자기는 두 잔 값을 냈으니 내놓으라고 큰소리를 친다.

같은 일행이라 다 같이 앉아 떠들고 있으면서, 정작 이럴 때는 남인 양 모르쇠 전략이다.

머그잔 개수를 세어보시라, 계산은 13잔인데 잔은 이미 13개가 나가지 않았느냐고 설명해도 "그건 내 알 바 아니지!"라며 버틴다.


딱 보니 시끄럽게 소란을 피울 스타일이라, 결국 내가 한 잔을 더 드리기로 했다. 그런데 돌아서는 아저씨의 한마디가 가관이다.

자기 일행들에게 돌아가며 “자기가 잘못 줘놓고는 웃기네.”라고 비웃는 게 아닌가. 다 들리거든요, 아저씨?


스무 명이 와서 13잔만 시키는 무례함도 참아줬건만, 기어코 한 잔을 더 뜯어가는 그 고약한 심보.

결국 다 아는 사이라 함께 웃고 떠들며 나가면서, 돈 앞에서는 철저히 타인이 된다. 서로를 종교적인 호칭으로 깍듯이 예우하던 모습과는 대조적인 행동에 씁쓸했다.

그분들이 믿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적어도 내가 배운 바로는, 타인의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그 어떤 성서에도 적혀있지 않은 가르침인데.


'휴, 내가 참지 뭐. 내가 좀 손해 보고 말지.' 하는 체념이 바탕에 깔려 있지 않으면 스트레스 때문에 장사를 할 수가 없다.

하지만 권리는 따박따박 따지면서 의무는 헌신짝처럼 버리는 인간들을 만날 때, 인류애가 바사삭 무너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칼을 뽑지 않으면, 못되게 방어하지 않으면 아무렇지 않게 타인의 호의를 권리라 주장하는 게 인간이라니.


매일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인생 공부를 한다.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을 겪으며 세상에 대해 냉소적인 시각을 갖게 되기가 쉽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애를 지키는 것은, 나를 괴롭히는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안의 온기를 지키기 위한 참 어렵고도 중요한 과제다.


바사삭 부서진 인류애의 잔해 속에서도, 끝까지 차가운 냉소보다는 치열한 온기를 품는 내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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