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by 서하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나온 유명한 대사가 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라는 대사.

그러게, 어떻게 사랑이 변할까.



언제부턴가 좋아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의 차이에 대해서 고민했다. 좋아하는 감정으로 시작해서 이것이 무르익으면 사랑하는 감정으로 넘어간다고만 배워왔지만, 그런 구분만이 둘의 다름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내가 지독하게 사랑하는 존재라고 해서, 그들을 모두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아픈 사실을 깨달으면서 고민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나에게 사랑은 감정의 영역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이성의 영역이다. 무조건적인 헌신과 책임을 동반하는, 지극히 이성적인 약속의 영역인 것이다. 마치 태어난 원가족을 선택하거나 바꿀 수 없듯, 사랑의 영역에 포함된 존재들은 인생의 거친 파도 속에서도 결코 변해서는 안 되는, 아니 변할 수 없는 삶의 상수와 같다. 그래서 사랑은 아주 묵직한 무게감을 지니며, 한 사람의 생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엄숙한 의무가 된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좋아함'의 영역은 이보다 훨씬 더 투명하고 날것의 감정적 영역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억지스러운 헌신도, 무거운 책임의 굴레도 따르지 않는다. 좋아함은 그 존재와 함께할 때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피어오르는 싱그러운 향기다. 그것은 벚꽃이 피어나는 봄날의 설렘, 한여름 숲속 계곡에서 느껴지는 상쾌함과 닮아있다. 절대로 스스로를 속일 수 없고 억지로 쥐어짤 수도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좋아함의 본질이다. 좋아함은 구름처럼 언제든지 모양을 바꾸고 흩어질 수 있는 가변성을 지니지만,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진심을 가장 솔직하게 비추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한 삶의 핵심 조건 중 하나는, 이 '사랑함'의 영역이 '좋아함'의 영역 안으로 최대한 많이 포함되는 행운을 누리는 것이다. 내가 내 모든 것을 바쳐 지키고 헌신하는 존재들을 진심으로 '좋아하기'까지 한다는 것, 의무적으로 짊어진 사랑의 짐이 사실은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기쁨의 원천과 일치한다는 것은 인생에서 마주할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다. 억지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그 투명한 좋아함의 감정이 묵직한 사랑의 약속과 맞닿을 때, 우리의 삶은 비로소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부드럽게 굴러간다.



진짜 고통은 이 두 원의 교집합이 점점 줄어들 때 찾아온다. 사랑이라는 거대한 책임의 닻은 내렸으나, 도저히 그 존재를 좋아할 수 없을 때의 괴로움은 영혼을 갈라놓는다.

좋아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 존재들이 많은 것은 인생의 가벼운 유희일 수 있으나, 사랑하지만 좋아할 수 없는 존재가 늘어가는 것은 평생을 짊어져야 할 시지프스의 바위와 같다. 내가 꿈꾸는 삶의 모습은 좋아함의 원이 더더욱 확장되는 것 그리고 그 속에 사랑함의 원이 쏙 들어가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평생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인 사랑, 그 묵직하고도 성스러운 원 안에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고 향기롭게 느끼는 것들이 더 많이 채워지기를, 그리하여 내 사랑이 ‘억지‘가 아닌 ‘기꺼운 즐거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영화 속 유지태에게 말하고 싶다.

이영애의 사랑이 변한게 아니라고, 그녀의 당신을 좋아한 감정이 변한 것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것이 사랑이었다면 무너진 당신을 두고 그렇게 영영 떠나버리지 못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