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 공백은 길 찾는 과정
다시 일하고 싶어 하는 여성들과 함께 일한 지난 4.5년 동안 꾸준히 들어온 말이 있어요. "왜 그때는 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까요?", "진작에 시작할 걸 그랬나 봐요.", "계속 일했더라면 지금쯤 OOO가 되었을 텐데…"
그 말을 감싸고 있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경력 ‘공백’이라는 단어에 실려 있는 나를 움츠려 들게 만드는 기운은 사회와 고용시장에 존재하는 편견 또는 차별이 더해져 시간을 낭비한 것 같아 자책하거나 지난 시간을 후회하게 만들기도 하죠. 돈을 벌지 않았다는 것 또한 한몫을 차지할 것 같아요. 내가 쏟은 땀과 노동의 대가이고, 실체적이고, 사는데 필수적인 ‘돈’이 일을 하고 있는 나와 일을 하지 않고 있는 나 사이를 구분하는 잣대인 건 사실이니까요.
잠깐만 시간 여행을 해볼까요? 지금부터 각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는 거예요. 타임머신을 타고 경력 공백이 시작되기 직전의 시점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만약 경력 공백을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내가 잘 아는 가족이나 친구를 한 명 떠올려 보고 그 사람이 되어 보세요. 그때의 상황이 그려지나요?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 이유들이 내 마음속에 내 주변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요. 고민이 많이 됩니다. 걱정도 되고 불안하기도 해요. 그리고 결국 일을 쉬기로 결정했어요. 당시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거예요. 여기까지!
“What If….” 가정문으로 그려 보는 상상의 내 행동과 그때 실재했다면 내가 취했을 행동 사이의 간극은 생각보다 큽니다. ‘아, 그때 일을 계속했더라면 지금쯤…’ 그러나 과연 지금의 ‘나’는 상상 속의 그 모습일까요?
그렇다면 난 공백이라 부르는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까? 그 일로 ‘돈’을 벌었는지, 노동시장에서 정의하는 직업의 이름을 쉽게 붙일 수 있는지의 기준을 잠시 걷어 내고 생각해 봅시다. 내 시간과 재능을 들여 몇 달 이상 지속했던 일을 하나씩 끌어올려봅니다. 처음엔 기억이 뭉툭할 수 있는데 조금씩 조금씩 선명하게 살아날 거예요. 이불 킥을 부르는 일, 해봤는데 원하는 만큼 잘 안 된 일, 해봤으니 됐다 싶은 일, 좋아할 줄 몰랐는데 해보니 꽤나 재미있었던 일,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혼자 신나서 활활 불태우며 했던 일, 잘한다고 남들한테 인정받은 일, 내 재능이 남에게 도움이 되었던 일, 나름 꾸준히 했던 일.
그렇게 흔적으로 남은 일련의 행동들, 흘러 보내고 잊어버릴 뻔했던 내 일을 복기하는 과정에서 나를 짓고 채웠던 나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시간이 존재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던 내가 거기에 서 있는 거죠. 많은 것을 경험했고 충분히 괜찮아 보이지 않나요? 어쩌면 경제적 보상 요인을 통제했을 때 나는 어떤 선택을 내리고, 어디에 내 시간과 머리와 몸을 쓰는 사람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 모먼트를 맞이할 수도 있겠어요.
그다음 단계는 내가 했던 행동과 행동에서 얻은 경험을 글로 옮겨 적어보는 거예요. 멋지게 꾸미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름을 제대로 붙일 수 없었던 성취와 배움을 구체화하고 언어화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활자 속의 내가 새롭게 보일 거예요. 아무것도 적을 수 없다면 아직 가장자리 생각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모두 아쉬움이 남았던 시간을 새롭게 발견하는 경험을 해보시기 바라요.
경력 공백을 극복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면 그 시간 동안 느끼고 경험하고 얻은 것들을 정성껏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흔쾌하게 들지 않을 겁니다. 긍정적인 점은 공백의 시간을 바라보는 태도를 스스로 정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진심으로 그렇게 바라보는지 바라보는 척하는지는 제일 먼저 내가 알고 내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도 알아볼 수밖에 없지요. 어떤 힘을 실어 나의 스토리를 전할지는 온전히 내게 달려있다는 것.
우리는 (아직까지 없었다면) 앞으로 살면서 비어 있다고 여겨지는 시간을 만날 때마다 길을 잃은 것 같은 감각을 느낄 거예요. 그럴 때 떠올리면 좋을 것 같은 리베카 솔닛의 <길 잃기 안내서>에 나오는 구절을 가져왔어요.
“19세기 수색구조팀은 곤란한 지경으로 길 잃는 경우가 드물었던 것 같다. 그 시절 사람들이 길 잃었던 이야기를 찾아보다가 깨달았는데, 일정이 빠듯하지 않은 사람, 땅에서 먹을 것을 구할 줄 알고 자취를 읽을 줄 알고 아직 지도에 나오지 않은 장소에서라도 방향을 찾을 줄 아는 사람에게는 일주일쯤 경로에서 벗어나는 일은 곤란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역사학자 에런 색스는 이런 답을 보내주었다. "탐험가들은 늘 길을 잃었습니다. 모든 장소가 처음 가보는 장소였으니까요. 아마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기술은 자신이 충분히 생존할 수 있고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낙관적 태도였을 겁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기억에 남는 또 하나의 문장이에요.
길을 잃는 것은 낯선 것들이 새로 나타나는 일이다.
이 세상이 우리가 알던 것보다 더 커진 셈이다.
우리가 익혀야 할 기술은 멈춰 서서 생각할 줄 아는 기술, 미지 속에서 당황하거나 괴로워하지 않는 기술, 길 잃은 상태를 편하게 느끼는 기술이다.
이제 첫 단계 준비가 된 것 같아요. 언어로 재구성된 나의 경험치를 재료로 삼아 낯설게 느껴졌던 기회들과 나를 연결해 줄 새로운 길을 찾아 나아가 보기로 해요. 다음 글에서는 다시 일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내가 바로 실천할 수 있는 일, 내가 스스로 만드는 경력, 나의 서포터들로 둘러싸인 주변 환경을 세팅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 나눠요!
내 고민은 나만 하는 걸까, 이런 고민도 얘기해도 되나, 망설이고 계신가요? 이제 고민 그만하시고 <고민 들어주는 언니들>에게 보내주세요. 저희들은 언제나 여러분의 고민을 잘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고민 투하는 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