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 3년 차, 5년 차, 아니면 10년 차?
안녕하세요. <고민 들어주는 언니들> 매거진 다섯 번째 글을 쓰는 연이입니다. 제가 사는 동네는 엊그제 아이들 학교 여름방학이 시작되었어요. 그리고 어제 집을 출발해서 아주 오랜만에 LA로 짧은 로드 트립을 왔답니다. 여행지에서 여러분이 보내주신 고민을 열어 보았어요. 오늘도 마음을 담아 고민을 잘 듣고 나누도록 할게요.
오늘 함께 나눌 고민은 미국에서 열심히 커리어를 쌓고 계신 분이 보내주신 내용이에요.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28세이고 경력 3년 차라서 올해부터 한참 일이 바빠지고 있어요. 아이는 3-4년 뒤에 낳을까 생각했는데 주변에서는 오히려 경력 초기에 낳으면 일하기 낫다고 하고요. 또 낳고 싶을 때 맘대로 안 된다고 해서 결혼도 일찍 했으니 빨리 낳는 게 나은가 팔랑팔랑 댑니다."
음, 아마 많은 분들이 공감하실 고민 같아요.
먼저 제 얘기로 시작해볼게요. 저는 아이를 일찍 낳지도 늦게 낳지도 않았어요. 사회생활 초반에 했던 일과 다른 일에 도전해 보고 싶어서 서른이 넘어 새로운 전공으로 석사과정 공부를 시작했는데 입학 직전에 첫 아이를 낳았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의 출산, 석사과정 진학 모두 제가 희망했던 시점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한 것도 아니었고요. 여러 굵직한 삶의 주요 사건들이 제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제 삶이 지금과 조금은 다른 궤적을 그려나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아이 나이가 지금보다 한두 살 더 많았을 수도, 다른 해에 학교를 졸업해서 다른 인연으로 다른 직장을 다녔을 수도 있고요. 단순하게 x축은 시간, y축은 내가 원하고 목표하는 일을 하는 나의 만족도로 정의한 그래프에 제가 내디딘 걸음들을 점으로 찍어 이으면 어떤 곡선을 그릴까 한번 떠올려 봤어요. 높은 빈도로 내가 계획한 시점에 일어나지 않은 일이 많긴 했지만, 내 맘대로 가정해 본 상상의 시나리오를 그려 넣더라도 곡선의 추세나 모양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니, 고민 얘기는 하지 않고 무슨 본인 얘기만 이렇게 늘어놓냐고요? 이유는 고민 상담을 어떻게 해 드려야 할지 막막하고 어렵기 때문이에요. ㅎㅎ 맞고 틀리고 옳고 그른 정답은 없음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끝나면 곤란한데 말이죠. 그래서 제 주변 지인들의 얘기와 그들의 지혜를 빌려와,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할 수도 있구나 하는 레퍼런스를 나눌게요.
제 지인 A는 한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배우자와 신혼 2년 차 즈음에 몇 년간 일을 하기 위해 미국으로 이주했어요. 경력을 해외에서 시작했죠. 비슷한 업무 강도에 경력도 비슷한 두 명의 파트너는 1년 정도 지난 후 아이를 갖기로 결정했고 이듬해 아이가 태어났어요. 엄마와 아빠의 직장 위치가 서로 한 시간 넘게 떨어져 있고 두 명의 직장에 데이 케어 시설이 없었기에 아이가 2개월 정도부터 집 근처의 작은 데이 케어에 다녔어요. 둘의 일을 위해 미국으로 와서 가족이나 주변의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집을 데이 케어에서 도보 5분 거리로 이사했고 엄마와 아빠가 아침과 저녁으로 역할을 나눴어요. 옆에서 지켜본 두 사람의 파트너십은 분주한 일터와 가정에서 안정적인 균형을 찾으려고 힘쓰는 모습이었습니다. 일, 가사, 육아를 정확히 50:50으로 나누는 것보다는 서로의 일을 존중하고 더 어렵고 바쁜 상황의 파트너를 적시에 서포트해주는 마음이 제게 닮고 싶은 레퍼런스가 되었어요. 물론 두 사람도 삐걱대고 다투고 억울하고 화나는 시기를 거쳐 조금씩 균형점을 향해 나아갔고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만.
다른 지인 B는 배우자와 서로 다른 주에서 일을 하고 있었어요. 십 년 정도 일을 한 즈음이었는데 각자에게 더 좋은 커리어 선택을 놓고 둘 중 한 명이 더 큰 희생을 하지 않고 몇 년 동안 타주에서 떨어져 지내기로 했지요. 그리고 서로 떨어져 있는 시기에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네, 객관적으로 따져보았을 때 가장 좋은 시기는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지요. (뻔한 이야기지만 출산의 완벽한 시기는 없고 설상 그런 타이밍이 존재한다 해도 magic wand를 휘두르듯 할 순 없다는 것 모두 아실 거예요) 아기는 첫 한 해 동안 온전히 엄마와 자랐습니다. 엄마에게는 아주 혹독한 일 년이었지만 일터에서의 상사와 동료들의 지원을 적극 활용해서 기특하게 잘 버텼습니다. 이웃과 위급 상황 도움 요청 와일드카드도 주고받았습니다. 물론 B가 먼저 제안했지요. 내가 놓인 환경이, 현실이 내게 매우 친절하지 않더라도 주도적으로 내게 가능한 선택지를 묻고 탐색하고 취하는 과정에서 가능한 퍼즐 조각들을 연결해 나간 B를 통해 작은 쓸모들을 엮어서 크게 키워내는 지혜를 배웠습니다.
때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직장의 시스템과 문화 때문에 내게 도움 되는 환경을 만들고 지원을 받는 것이 불가할 수 있습니다. 더 나은 환경을 위해 내가 원할 때 원하는 곳으로 이직하는 것이 항상 가능한 옵션도 아닙니다. 제가 나누는 얘기가 이상적으로 또는 추상적으로 들린다고 느끼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내가 아쉬워서, 내 발등에 떨어진 문제를 해결하려고 다급하게 손을 내밀 때 때로는 가장 소중한 연대가, 동료애가, 단단한 힘이 탄생하는 것 같거든요.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았는데도 아직 저는 고민에 대한 슬기로운 답을 드리지 못하고 있네요. 어떤 사람은 가능하다면 사회 초년생일 때 빨리 출산하는 것이 이후 커리어에 유리하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직장에서 어느 정도 내 위치를 공고히 하고 더 많은 권한과 자유도를 가진 후에 아이를 낳는 것이 더 좋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개인마다 상황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시기를 논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나이, 사회생활 연차 등의 숫자가 결정할 때 꼭 함께 고려해야 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네요. ‘아이를 낳기로 파트너와 함께 정했고, 서로의 일과 삶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힘껏 지지하며, 아이를 낳은 이후의 생활에 대해 솔직하게 고민을 털어놓고 같이 얘기하고 준비하면 그게 내게 가장 좋은 시점’이 아닐까 생각해요.
브리짓 슐트는 저서 <타임 푸어>에서 “여성에게 일을 하더라도 주양육자로서의 역할을 기대했던 사회, 일에 헌신하는 문화 속에서 항상 일만 하는 노동자를 기대했던 직장에서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선택권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직장에 몸과 마음을 완전히 바칠 수 있는 과거의 이상적인 노동자 상은 우리 모두를 힘들게 한다는 것이죠. 일하는 여성이자 엄마가 되는 것에 대해 불안과 걱정이 있다면 일하는 남성이자 아빠가 되는 배우자에게도 똑같이 다가오는 우리의 문제라는 데에 동의합니다.
글을 마무리하려고 하니 제가 오늘의 고민을 보내주신 분의 마음을 헤아려 잘 들었는지 슬금슬금 걱정이 되네요. 아마도 내가 원하는 일을 멋지게 잘 해내고 싶은 마음, 나를 지키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고민이었겠지요? 이 마음을 축소하거나 상처 내지 않고 온전한 삶을 살고 싶은 여러분에게 오늘도 응원을 보냅니다. :D
또 다른 고민이 있으신가요? 망설이지 마시고 여기에 고민을 투하해주세요! 고민 들어주는 언니들과 같이 이야기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