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스릴러 영화에는 기대되는 것들이 있다. 자극적인 범죄, 권선징악, 반전 같은 것들. 그런데 프란시스 맥도먼드 주연의 범죄 스릴러 영화 '파고'를 보고 나면 어쩐지 다른 메시지가 더 기억에 남는다.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소박한 일상이 악의 세계도 이길 수 있다는 메시지가 그것이다.
매서운 겨울, 도시 파고의 자동차 회사 영업부장 제리는 장인의 돈을 얻기 위해 동네 불량배인 칼과 게이어에게 아내 납치를 부탁한다. 아내를 풀어줄 때 장인에게 받을 보상금을 서로 나누기로 합의하고 제리는 차를 제공한다. 아내를 납치하고 도망가던 불량배들은 하필 차에 번호판이 없어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되고, 경찰과 목격자를 죽인다.
만삭의 임산부 형사 마지는 살인 사건의 수사를 맡게 된다. 살해된 경찰관의 기록에 제리의 차량 정보가 발견되면서 제리와 살인자들 모두 궁지에 몰리게 된다. 이후 제리의 장인이 살해당하는 등 우발적인 사고들이 벌어지면서 영화는 절정을 향해 간다.
영화에서는 지독한 악과 어둠이 등장한다. 아내를 납치하라고 지시하는 악인의 등장과 함께, 무수히 많은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단순히 살인 사건 해결에만 방점이 찍히지 않는 이유는, 악의 세계와 대비되는 주인공 마지와 남편 놈의 일상 덕분이다.
마지와 놈은 경찰서에서 같이 근무하는데, 급히 출근을 하는 만삭 와이프를 위해 남편은 계란 요리를 해주고 차량 시동을 걸어준다.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서로에게 애정을 전달한다. 마지는 놈이 부업으로 하고 있는 삽화 작업이 잘 되고 있는지 묻고 놈의 소소한 상황에도 사랑을 듬뿍 담아 응원해 준다. (부업의 최종 결과는 글 마지막에 적어둔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대화를 나누는 장소는 침실이다. 침실의 전화기를 통해 외부 악의 세계가 부부에게 전달되기는 하지만, 영화에서 침실은 어둠과 겨울을 이기는 따듯한 일상의 세계를 상징한다. 따듯하고 안온한 침실에서 나누는 대화들은 영화 속 어둠과 겨울을 이기는 힘이 된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돈이 아니라는 것을 영화는 이야기한다. 영화 후반부 살인범을 검거한 마지의 대사가 이를 뒷받침한다.
For What? For a little bit of moeney?
무엇 때문에? 약간에 돈 때문에?
There’s more life than little bit of money
사는데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Don’t you know that? 그걸 몰랐어?
And here you are it’s a beautiful day!
당신 꼴을 봐 이 아름다운 날에
I just don’t understand it 난 이해할 수가 없어
- 살인자 검거 후 마지의 독백 중
사는데 돈보다 더 중요한 게 무엇이라고 물으면 마지는 남편과 보내는 한 끼의 식사와 일상이라고 말할 것 같다. 소소한 순간과 평범한 하루가 직조되며 만들어지는 일상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하다는 것을 생각해보게 한다.
3. 동업자의 중요성
영화는 1987년에 미네소타에서 발생한 실화이며 희생자를 존중해 이름만 바꾸고 나머지는 최대한 살려서 영화화했다고 소개한다. 그래서 잔뜩 심각해진 마음으로 영화를 보게 한다. 이게 실화라니, 정말 최악이군. 실제로 어떤 벌을 받았을까, 80년대는 정말 야만의 시대였구나 생각하게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 영화가 실화라는 것은 거짓말임을 알게 된다. 뒤통수를 얼얼하게 맞은 느낌을 받으며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며 혀를 끌끌 차고 있노라니, 실제로 이 영화는 믿을만한 사람을 고르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영화 내내 서로 속이고 또 우발적으로 판이 악화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제리가 제공한 자동차 때문에 용의자들이 궁지에 몰리고, 경찰을 죽이게 되면서 판이 더 커진다. 또 우발적으로 제리의 장인이 죽고, 선량한 시민들도 살해당한다. 한번 꼬이기 시작하면 끝없이 꼬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일까. 이런 난장판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을만한 동업자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영화에서 마지와 놈은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최상의 동업자(동반자)로 등장한다. 하지만 주인공 부부를 제외한 나머지 관계들은 최악의 동업자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장인의 돈이 필요해서 아내를 납치해 달라고 하는 최악의 남편(심지어 불량배들도 도대체 왜 납치를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과 서로 말이 안 통해서 같은 편이지만 위태롭게 싸우는 불량배들까지 - 커뮤니케이션의 오류로 파멸하는 영화 속 관계들을 보며, 사회생활의 대부분이 커뮤니케이션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좋은 동업자의 모습을 꼽자면, 최근 예능 '사이렌 불의 섬'에서 나온 장면이 떠오른다. 짧게 요약하자면, 소방팀의 리더가 다른 팀의 마음을 얻고 진심으로 협력하고 싶은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상대방에게 등을 보여주고 앞장서는 모습이 나온다. 다른 팀이 본인 등의 깃발을 빼면 본인이 탈락하는 상황임에도 등을 먼저 보여주면서 상대를 안심시키고 마음을 얻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기억하고 싶은 동업자의 자세였다.
이제는 거장이 된 코엔 감독과 프란시스 맥도먼드의 오래전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파고는 즐거운 경험이다. 특히 프란시스 맥도먼드는 무려 총 세 번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 그 첫 번째 작품인 파고를 통해 풋풋했던 예전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다른 여우주연상 수상작은 쓰리빌보드, 노매드랜드) 코엔 형제도 파고를 통해 유수 영화제 상을 휩쓸고 이후 인사이드 르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등을 만들게 된다. 거장들은 초기작부터 확실히 뭔가 달랐구나 싶어 이들의 재능이 눈부시다.
영화의 가장 마지막 장면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남편 놈의 삽화 그리기 부업은 우표 3센트 삽화 당선으로 끝을 내린다. 놈은 굉장히 별 것 아닌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아내 마지는 따듯하게 치켜세워준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해준다. 우린 꽤 잘하고 있다고. (We're doing pretty good) 나도 열심히 일상을 사는 내가 꽤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나의 소중한 일상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Norm: They announced it. Three-cent stamp. 발표가 났어. 3센트 우표로 뽑혔어.
Marge: Your mallard? That's terrific. 당신이 그린 청둥오리가? 정말 멋지다!
Norm: It's just a three-cent. Hautman's blue-winged teal got the 29-Cent. People don't much use the three-cent. 고작 3센트 우표인데 뭘. 하웁만의 오리 그림은 29 센트 우표 삽화로 뽑혔어.
Marge: Of course they do. Whenever they raise the postage, people need the little stamps. When they're stuck with a bunch of the old ones. That's terrific.
그렇지 않아 여보. 3센트 우표도 많이 써. 옛날 우표와 같이 추가로 붙일 때 작은 우표를 써. 정말 멋지다.
I'm so proud of you, Norm.
You know, we're doing pretty good.
당신이 자랑스러워. 우린 잘하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