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뿔싸, 지갑을 가져오지 않았다.
길 위에 흩뿌려진 회상을 다시금 거두었던 날의 시작점이다. 할 수 없이 집까지 걸어가야 했다. 소요 시간은 20분 정도. 걸음을 빨리 뗄 기운이 없던 나에게 맞춰진 속도였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노란 은행잎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늘을 자주 쳐다보지 못한 사이에 벌써 이만큼 물들었다. 크게 숨을 쉬어본다. 이 냄새를 뭐라고 해야 할까? 진한 가을 향기가 코끝에 들어찬다. 불처럼 강렬한 단풍잎도 봐달라고 손짓하니 고개를 더 높이 들었다. 설익은 초록 잎과 힘을 다하는 주황 잎,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잎들의 자태가 어여뻤다.
보행자 공간 옆에 퇴근하는 차들이 빼곡히 줄지어 있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는 나 또한 저 안에 있었는데. 그때는 걸으면서 메모할 새도 없이 급히 움직여야 했다. 비교적 자유로운 시간이 찾아온 요즘도 어찌 보면 바라왔던 꿈의 일부였다. 막상 상황이 닥치면 아쉬운 점이 보이기 마련이지만. 지금을 꿈꾸던 때를 생각하면 꽤 즐겁다. 일단 걷고 있는 내 배가 부르니까. 엄마와 저녁으로 칼국수를 먹고 오던 길이었다. "등갈비찜 어때? 아니면 샤부샤부?" 메뉴를 추천해 보지만 늘 답이 정해져 있는 엄마는 칼국수를 골랐다. 어릴 때 외식하면 아빠와 자주 먹었던 음식이었다. 칼국수를 배불리 먹고 나온 초등학생의 내가 집에 들어가자마자 드러누웠던 순간이 생각난다. 입에서 "아~ 행복해!"라는 말이 나왔던 것도. 순진한 꼬꼬마에게 행복은 배부름 뒤에 오는 미소였나보다.
나무를 지나쳐갈수록 흑백 장면이 상기됐다. 내 키가 아빠의 종아리만 할 때의 겨울은 전국적으로 눈이 많이 왔다고 한다. 눈밭에 누워보라는 아빠의 요구에 두 팔을 활짝 펴고 뛰어내렸다. 눈에 둘러싸인 나를 재밌어하던 아빠가 사진을 찍었던 것 같은데. 주황색 파카를 입고 있었나, 간신히 기억에 색을 입혀보지만 흐릿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행복은 차가운 눈의 촉감 뒤로 나누던 웃음소리였겠지. 대단한 정의나 조건 없이 얻는 행복이 길 위를 걷는 내게 스쳤다. 왜인지 어른이 될수록 배부름과 해맑음에 인색해지는 경우가 늘어간 것 같았다.
현재 속에 과거가 배어들었다. 건널목을 건너는 데 익숙한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몇 초간의 반색이 무색하게도 단 한 번 대화하지 않은 사람이다. 타지에서 퇴근 버스를 타고 이동할 시기, 항상 같은 줄을 서고, 같은 곳에서 내렸던 분. 매일 마주쳤기 때문에 안 보이면 찾게 되는 이상한 친밀감이 있었다. 당분간 진저리나는 오후 6시는 안녕이겠구나 싶었던 거리에서 뜻밖의 반가움을 느꼈다. 만난 건 이뿐만이 아니다. 벤치 위에 종이컵이 덩그러니 올려져 있었다. 누군가 커피를 마시고 둔 빈 종이컵. 이 종이컵은 알았을까, 이후에 어떤 걸 담게 될지- 어디에 쓰일지. 자기 피부로부터 온 걸 아는지, 나무도 작은 종이컵을 지켜보는 듯했다.
또 무엇이 만들어지려나. 무엇이 탄생해서 무엇으로 쓰임 받게 될까. 나무와 닮은 나의 첫걸음을 되새겼다.
아파트 상가를 지나갈 때면 기분이 묘하다. 태어날 때부터 이곳에 살았던 내가 처음으로 할머니 손에 붙들려 간 미술학원이 이 상가 안에 있다. 할머니는 눈치챘을 거다. 표현이 서툰 손녀가 확실하게 존재를 드러낼 방법은 손을 움직이는 거라는 걸. 10살 아이는 거기서부터 선 긋는 법을 배웠다. 사각사각하는 연필 소리가 익숙해질 때쯤에는 색을 칠했다. 뼈대부터 출발해 덩어리를 잡아가기까지의 과정은 삶 가운데에서도 동일했다. 언니가 애써 숨겨두었던 그림 연습장을 몰래 빼내 선을 덧대던 나는 이제 내 걸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됐다. 타인으로부터 벗겨지는 것이 아닌, 스스로 껍질을 벗겨낼 수 있는 그런 나무가 됐다.
그러니 궁금하다. 나의 껍질을 벗겨 무엇이 탄생하고, 무엇으로 쓰임 받게 될지.
마침내 무사히 집 앞 현관문을 열었다. 불편한 신발만 신어 꾸깃꾸깃해진 발이 뒤늦은 통증을 호소한다. 아픔을 참아내던 방법도 이제 보내줘야 하나. 돈 나갈 구멍은 많겠지만 발의 행복만큼은 지켜줘야 하나. 신발을 치우는데 이보다 더 꼬질꼬질해진 아빠의 운동화가 눈에 띄었다. 한참 꾸준한 수입이 있을 때 선물해 준 브랜드 신발이다. 밑창이 닳아 다 뜯어지고 검게 된 운동화만큼 마음도 때가 탔다. 그럼에도 형태를 살려보겠다고 운동화 곽을 넣어놓은 모습이 뭉클하다. 돈 나갈 구멍은 많겠지만 새 신발만큼은 허락해야겠다. 한 켤레가 아닌 두 켤레로.
하나의 행복이 아닌, 두 개의 행복으로.
길 위를 걸어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