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선한 밑줄

by 슬로우소소

수족냉증에 고통받는 계절이 왔다. 꽁꽁 언 두 손을 살리고자 머그잔에 김이 펄펄 올라오는 물을 받았다. 손가락 끝까지 남김없이 포개고 싶었건만, 아쉽게도 컵이 작다. 그나마 넉넉한 자리를 차지한 손바닥도 뗐다가 붙이기를 거듭했다. 재빨리 온기를 얻고 싶은 욕심을 부렸나, 커피포트의 물이 굳이 다 끓지 않아도 괜찮았으려나. 그릇을 옮기지는 못하니, 컵 속의 열기가 부드러워지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오늘은 쉬는 날이다. 노란불에 머물러있는 시간을 길게 가져보기로 했다. 지키고 싶은 수식어도 정했다. '결이 맞는' 장소에 찾아가기, 내 마음 '여유 있게' 인정하기, '결이 닿는' 문장에 밑줄 긋기, 타인의 마음 '유연하게' 들여다보기. 단순히 취향에 맞는 카페에 가서 노트에 아무 말을 적고, 좋아하는 책을 보는 시간이다. 뜨뜻미지근한 기분을 유지하는 것이다.


며칠 전, 뜨거운 심장을 토로하는 글을 SNS 공간에 나눴을 때 많은 작가님께서 좋은 말씀을 적어주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래 교류해 온 작가님께서도 댓글을 남겨주셨는데, 이를 읽고 마음에 밑줄이 그어졌다. 또렷이 그어진 문장은 이러했다. "사랑도 쉬는 시간이 필요한가 봐요." 정말 그렇다. 사랑하는 것도 쉬는 시간이 필요했다. 잠시 멀어져 보는 것도 날 지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글을 올리고 괜스레 편치 않았던 건, 두려움을 덮어두려 했던 데서 온 걸까. 쓰는 순간만큼은 스스로에게 솔직하다고 생각했는데, 마냥 그렇지는 않았나 싶다. 뜨거운 심장을 쫓아 사람도 일도 가까이 두고 싶은 갈망에 지치기도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도움받아 삶을 응시하는 또 다른 눈을 얻어간다. 내 세상 속에 선한 밑줄을 그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책갈피로 꽂아두고 싶은 진심을 나눠주는 분들이 있다. 이 글을 읽어주는 당신이 그렇다.



실컷 울 수 있는 곳이 있다. 울려고 가는 게 아닌데, 잠가두었던 눈물이 제멋대로 흘러넘친다. 그곳에 있다 보면 응어리진 결핍이 부끄럽지 않게 된다. 오히려 이로 하여금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다. 왜 그런지 돌이켜보니 믿음이 가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믿을 수 있는 이에게도 마찬가지다. 속내를 내비칠 수 있다는 건 큰 힘이 된다. 진심이 할 수 있는 일은 반드시 있다는 걸 증명하듯이, 진심을 녹여내고 닿기까지 힘을 써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게임과 만화영화에서 등장하는 조력자처럼, 나도 누군가 향하는 길에 힘을 보태어 주고 싶다. 가지고 있는 무기는 조촐해 보일 수 있지만 진심 하나다. 가는 길 외롭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 됐다.



여유 있게, 결이 맞는, 유연하게, 결이 닿는. 가다듬어진 열기 뒤로 새로운 수식어가 피어난다. 쉬는 시간이 필요할 때면 나를 방어해 준 단어들을 떠올릴 것이다. 밑줄을 남겨준 이들을 기억할 것이다. 더욱 '감사하게'.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