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삶의 조각을 바라보며

by 슬로우소소

오래된 버릇이 있다. 애착 이불을 코에다 바짝 대고 잔다던가, 이불 끝을 한참 만지작거리는 것도 그중 하나다. 어렸을 때는 애착 베개가 존재했다. 하얀색 바탕에 파란색 물결무늬가 그려져 있는 베개였다. 언제부터인지 내내 들고 다니며 배게 한쪽 부분을 새끼손가락으로 쓰다듬고는 했다. 신기한 건 그렇게 애지중지했던 베개를 어느 순간 버리라고 했다는 거다. 놀라울 만큼 단호하게. 하지만 나름의 안정을 주었던 버릇만큼은 내치지 못했는지, 어른이 된 나는 또 다른 애착 물건을 만들었다. 깨졌다고 생각한 어린 날의 조각이 이윽고 붙어 하나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저마다 성향과 분위기가 다르듯, 각자에게는 각자만의 속도가 있다. 어느 방향으로 가는가에 따라 나의 속도는 느려지기도 하고, 빨라지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연결된 줄도 이 속도를 따라가는 것 같다. 때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 순간은 누군가와 연결되기까지의 텀이 길어진다. 그러다가 마음이 정비됐다 싶을 때 다시금 저 멀리 늘려져 있는 줄을 당긴다. 우리는 다를 뿐, 그 어느 속도도 정답은 없었다.


"나 그래도 소소를 오랫동안 알았잖아. 근데 네 글을 읽을 때 그동안 봐왔던 날들보다 너를 더 많이 알게 되더라. 기분이 신기했어."


며칠 전 애니가 해준 말이 생각난다. 시간이 참 빠르다는 표현이 부족할 만큼 서로에게 쌓인 추억이 많지만, 그럼에도 나를 알아가려 해주는 애니에게 고마웠다. 그녀를 만나고 오니 깨닫게 된 점이 있다. 명확한 사실이라기보다, 또 하나의 가치를 마주했다는 것에 가깝다. 연결되고 끊어지기를 되풀이하는 줄다리기 속에서도 결국은 내 곁에 계속 남아있어 줄 것만 같은 벗이 있다는 점. 막연한 당연함이 아니라, 편안한 안심이 되는 관계. 그냥 나로 있어도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는 관계. 자연스럽게 그런 사이를 따라가게 됐다.



세상이 빨라질수록 본질이 잊혀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날이 발전해 가는 기술이 단순히 본질을 지우는 역할만 하는 건 아니었다. 때로는 그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는 시간이 나에게 더 맞는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되었다. 본질을 더 지켜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되는 것도 기술이 내게 준 선물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 될 수 있다면 쉽게 흩어질 수 있는 것들을 지키는 삶을 살고 싶다. 흐르는 세상을 억지로 붙잡지는 않을 테다. 그저 이 흐름을 느리게 담아보는 시선, 오래 살피고 생각해야만 얻을 수 있는 의미, 본질이 모여 축적된 신념을 지켜가는 게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이다.


언젠가는 누구나 느끼기에 반짝이는 별이 되고 싶었다. 그치만 지금은 꼭 그러지 않아도 괜찮을 듯하다. 내가 나를 봤을 때 이미 충분히 반짝이고 있다. 나름의 빛을 존중하고 믿어주게 된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해본다. 물론 어느 때는 낙심하여 스스로를 마구 몰아세우기도 하겠지만, 그럴수록 자신을 지켜줘야 한다. 흩어지지 않게, 사라지지 않게 나 또한 지켜내야 한다. 조금씩 채워지는 삶의 조각을 바라보며.



속도와 방향을 알아가는 시기다. 내가 큰 별이든, 작은 별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나와 맞는 이들을 벗 삼아 오늘을 살아간다. 나의 동네와 너의 동네를 정겹게 돌아보며, 각자의 속도를 왜곡 없이 받아들여 주는 존재와 내일을 내딛고 싶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