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넘어설 용기

by 슬로우소소

근래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아지트를 자주 방문하게 됐다. 예부터 왔다 갔다 하던 조용한 카페인데, 하도 익숙해지다 보니 자연스레 지정석이 생겼다. 꼭 여기서 따뜻한 녹차 라떼를 마셔야만 마음이 놓이는듯하다. 하지만 이렇게 남몰래 찜해놨다고 해도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다. 벽에 바짝 붙어 있는 1인용 탁자는 많은 짐을 놓을 수 없다. 반쯤 열린 커튼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모습을 드러내기에 유심히 보지 않는 이상 존재를 알아차리기 힘들다. 그래서 좋다. 아담한 공간에 맞춰 올려놓을 물건을 추리다 보면, 가지처럼 뻗어있던 생각도 하나로 모여든다. 참 한결같다. 언제 가도 공석인 자리에 365일 산타 인형이 놓여있다. 어째 캐럴이 들리기 전의 계절이 더 설렌다. 긴 시간 끝에 눈을 맞이하고 나면 내내 한 곳에 붙어있던 인형을 다독여준다. 이번에도 잠잠히 잘 기다렸구나.


이 장소를 온전한 나의 영역으로 받아들인 건 언제부터였을까. 무엇이든 처음 만나는 것은 문턱을 넘을 용기가 필요한데, 어느 시점에 그런 결단을 하게 된 걸까. 내게 딱 맞는 옷처럼 느껴질 때가 되어서야 주변을 둘러봤을 것이다. 좌석과 메뉴처럼 시종일관 예측 가능한 범위를 만들어 자신을 덜 불안하게 한 걸 거다. 이처럼 나는 늘 내 등을 떠밀던 의문의 조급함에 의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을 추구해 왔다. 그럼에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연하다. 더군다나 완벽히 보장되는 결과는 지금의 내게 있어 욕심이다. 좋아하는 일도 책임져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책임지기 위해서는 버텨야 한다. 버틴다는 건 나아간 만큼 또 다른 문턱을 넘어설 용기를 챙기는 것이다. 이 각오가 익숙해질 무렵의 나는 조금 더 노련해진 사람으로서 서 있게 될까. 나의 품으로 들어온 글이, 그림이, 책이 생존 앞에서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될까.



얼마 전 상담을 받았다. 짓눌려오던 상처가 뒤늦은 나이에 터져버리고 말았음을 직감했다. 그 사이에는 누군가를 향한 죄책감과 원망이 동시에 있었고, 이런 양가감정은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와 나를 어린아이로 만들었다.


"소소, 엄마를 생각하면 무슨 기분이 들어?"

"미안해요."

"아빠를 생각하면?"

"......미안해요."

"왜? 왜 미안할까?"

"그냥 두 분이 힘들어하는 게 저 때문인 것 같았어요. 그걸 채워주고 싶었는데···."

"소소야, 미안해하지 말고 고마워해. 미안하다고 하는 거랑 고맙다고 하는 건 전혀 다른 거야. 엄마와 아빠의 인생은 그 둘이 선택한 삶이니 네가 간섭하지 않아도 되고, 붙잡고 있지 않아도 돼. 소소 넌 너의 삶을 살아.”


조금은 이기적이어도 괜찮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 듣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사랑이라는 이름>은 나의 첫 번째 공동체였던 가족에게서 파생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사랑 안에 속하는 여러 복합적인 감정들을 어떻게 인정해야 하고, 보내야 하는지 혼란이 오던 날이었다.


서로를 보며 웃는 부부, 그리고 그 미소를 한움큼 물려받은 아이. 어느 날 접하게 된 풍경에서 사랑이 잔뜩 느껴졌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아이가 부러워졌다. 평범할 수 있는 단란함이 슬프다. '어렸을 때의 난 어땠으려나, 나도 이랬으려나.' 물음 뒤로 질문이 떠올랐다. '언젠가 나도 이런 가정을 꾸릴 수 있을라나, 그럴 수 있을라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희망을 품고 싶은데 미처 보내지 못한 두려움이 마음 한 구석에 놓여있었다.


그래도 나는 풀고 싶다. 달라지고 싶다.



그늘은 누구에게나 있기에 나에게도 있다. 이제 그늘 속에 갇혀있던 나를 해방시키겠다. 늦은 만큼 부지런히, 그럴 수도 있었다고 달래주겠다. 나를 사랑하는 과정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최종 목적지가 되도록.


상처가 나 병원에 갔더니 헐어서 피가 나는 거라고 했다. 아플수록 간지러운 건 마음도 똑같다. 딱지를 자꾸 떼어내려 할수록 악순환에 빠진다. 건드리고 들추고 싶은 감정을 참는 시기라고만 여기지 않을려고 한다. 마음이 낫게 해줘야 하는 시기라 한다면 조금씩 넘어설 수 있을 것 같다.


문턱 앞에서.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