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뒤척거리기를 반복하다 결국 침대를 벗어났다. 이 뒤숭숭함의 원인을 끄적여본다. 눈으로 확인해 보니 그 어느 것도 무의미하지 않은 게 없다. 알고도 요동했다. 제멋대로 자라난 잡초들이 마음 여기저기 엉겨 붙는 걸 보고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다 나를 힘들게 하는 억센 풀에 당연한 에너지를 쓰게 됐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내쉬어온 숨은 틈 없이 감겨있던 덩굴 때문이 아니다. 하루 속에 소복이 쌓인 웃음이 양분이 되어준 덕분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은 일, 대단하지 않은 농담에 박장대소를 터트린 일. 내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건 언뜻 보기에 별일 아닌 순간이었다.
평생 같은 곳에 머무른 나도 안 가본 데가 있다. 처음 내려보는 역이라니, 지하철 노선이 겨우 한 개밖에 없는 지역에도 미지의 공간은 존재했다. 오늘 만남이 성사된 건 전날 밤. "내일 뭐 해?"라는 간단한 안부가 정겨운 약속으로 이어졌다. 우체국을 들리면 늦어지지 않을까 싶어 평소보다 일찍 나온 참이다. 그런데 한 시간이나 먼저 도착하게 될 줄이야. 어슬렁거리며 개찰구를 나오니 작은 의자 2개가 눈에 띄었다. 다른 역에 비해 조촐하긴 해도 앉아서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었다.
비슷한 사정이 있는지 몇 분 뒤 한 사람이 다가와 옆에 앉았다. 보기 드문 파란 표지의 책을 꺼내 읽던 여자분이었다. 나란히 앉은 우리는 여유가 없는 의자의 간격만큼 어깨를 가까이하게 됐다. 물론 낯선 이에게 '우리'라는 말을 붙여도 되나 싶지만. 그렇게 30분 정도가 지나니 옆 사람의 일행이 나타났다. 빈자리가 되자, 꽤 오랜 정적이 전부였던 공간에 갑작스러운 찬기가 맴돌았다. 예기치 않게 좁혀진 제삼자와의 간극이 묘한 든든함을 가져다주었나.
드디어, 저 멀리 그녀가 걸어온다. 웹툰 작가답게 가방 두둑이 장비를 챙긴 그녀. 갑작스러운 번개에는 서로의 작업을 진행하겠다는 목적도 있었다. 막상 만나니 말짱 도루묵. "여기 뭐 재밌는 거 없나? 우리 뭐 재밌는 거 하다 들어가자!" 예나 지금이나 할 일 미루는 게 가장 즐겁다. 카페에 들어가니 본격적으로 엉뚱한 소리를 하기 시작. 양심상 꺼내놓은 패드가 제 역할을 하지 않은 지 두 시간이 지났을 무렵, 다음 단계의 신호탄을 나지막이 내뱉었다.
"아, 출출한데."
1차가 막을 내렸다.
마라탕집에 들어가 당당하게 재료를 집어 드는 그녀와 나. 각자 그릇에 담은 재료의 무게대로 가격이 찍히는데, 1인분이 17,000원이나 찍혀 당황하고 말았다. 반년 새 물가가 오른 건지, 재차 측정해 보지만 숫자는 그대로다. 씁쓸함을 안고서 식탁에 앉은 그녀와 내가 담소를 나눴다.
"어른 되면 안 그럴 줄 알았는데, 갈수록 이런 게 신경쓰인다?"
"맞아, 책임지고 일해야 모으는 돈이니까."
꿔바로우는 차후를 노리는 게 어떠냐는 질문에 즉시 동의해 본다. 그러면서도 이내 모습을 드러낸 영롱한 마라탕에 주춤하던 기운이 쏙 들어갔다. 굶주린 배를 채우니 지극히 평범하던 바깥 풍경도 낭만적으로 펼쳐진다. '행복하면 됐다.'라는 단순한 다짐이 이렇게 속을 홀가분하게 하는 주문이었나. 요즘 들어 어디에서나 보이는 유행의 대명사, '두쫀쿠'가 떠올랐다. '이 비싸고 조그마한 걸 줄 서서 사 먹어?'라는 편견에 둘러싸였던 내가 '함께'라는 이유로 뒤늦은 유행에 합류했다. 결론은 역시나 맛있었다. 불안정한 경기 안에서 실패하지 않을, 확실한 만족을 찾아간다는 두쫀쿠의 배경에 고개를 끄덕여봤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해도 이미 반박할 수 없는 어른이 됐다. 멀리서 바라만 보던 아홉수에 진입해 버렸다. 달라진 것 같기도, 똑같은 것 같기도 한 우리의 인생- 끝없이 다듬고 써 내려갈 뿐이다. 그럼에도 '여전한' 것들이 있다는 사실에 위로도 받고, 한숨도 내쉬며.
완전한 타인들에게 내 이야기가 어떤 형태로 다가서게 될까. 마치 자신의 일부처럼 스며들고 녹아드는 때가 있을까. 그들의 일상에서 나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을까. 묻고 싶다. 가늠할 수 없는 생에서 당신은 무엇을 통해 만족을 채워가려고 하는지.
완벽하기만 한 하루가 없어서 소소한 행복들이 더 귀중해진다. 이를 증명하듯, 그녀가 낮에 넌지시 던졌던 한마디가 나를 다시 잠들게 했다.
"역시 겨울에는 뜨끈한 국물이지."
별거 아닌 한마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