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우세한 영역에서 싸우자
<에피소드1> 가위바위보 로봇 (Janken Robot)
(출처: Ishikawa Oku Laboratory)
몇년전 일본의 한 대학 연구실에서 만든 로봇인데 인간과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면 승률 100%다.
로봇이 초고속 카메라로 사람의 손가락 모양을 순간적으로 판독해서 이기는 수를 내는 것이다.
인간의 눈으로는 로봇과 인간의 손이 동시에 나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로봇이 인간의 손 모양을 확실히 읽은 다음 이길 수 있는 수를 미세하게 늦게 내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이런 게임에서 절대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다.
<에피소드2> 매크로 예매
요즘에는 유명 아이돌 가수 공연 티켓이나 프로야구경기 관전 티켓을 '매크로'라고 하는 자동 예매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수초만에 싹쓸이 예매를 한다고 한다.
이렇게 무더기로 사들인 표들을 몇 배 내지 몇십 배씩 마진을 얹어 암표로 되팔고 있는 업자들이 기승을 부린다.
오죽하면 '피가 튀는 전쟁 같은 티켓팅'이라는 뜻으로 '피켓팅'이라 부르겠는가.
우직하게 컴퓨터 앞에서 독수리타법으로 예매에 나서는 건 이젠 순진한 행동인 셈이다.
매크로 예매를 처벌할 관련법이 없다고 정부에서 손 놓고 있는 사이에 약삭빠른 인간들만이 이득을 보는 세상인 것이다.
<에피소드3> 알파고
2016년에는 왠 듣도보도 못한 알파고라는 인공지능이 등장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우리나라의 이세돌 9단과 중국의 커제 9단을 모두 꺾은 구글 딥마인드사의 인공지능 알파고는 인간 바둑계를 제패하고 이제는 은퇴했다.
그로부터 1년 남짓한 시간이 흐른 뒤 알파고보다 더 무서운 '알파고 제로'라는 놈이 나타났다.
알파고 제로는 72시간을 독학한 뒤 이세돌 9단을 꺾은 알파고를 상대로 100대 0 압승을 거두었다.
기존 알파고는 인간의 바둑기보 16만 개를 이용해서 학습했지만 알파고 제로는 인간의 바둑기보를 전혀 참고하지 않고 490만 판을 스스로 대국하면서 진화했다는 점이 참으로 놀랍고 섬뜩하기까지 하다.
<에피소드4> 내부자 거래 비즈니스 모델 (insider trading business model)
에피소드4는 최근에 흥미롭게 읽었던 '블랙 에지 (BLACK EDGE)*'라는 책에 나온 이야기다.
월스트리트 역사상 최강의 헤지펀드 트레이더를 추적하는 미국 연방 검찰과 FBI의 수사 다큐멘터리다.
내부자 정보를 이용한 거래는 분명 불법이지만 많은 헤지펀드가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내부자 정보와 미발표 보고서를 이용하여 손쉽게 거액을 벌어들이고 있다.
헤지펀드가 트레이더나 애널리스트를 채용할 때도 기업의 내부정보를 빼낼 수 있는 인맥이 있느냐가 채용여부를 가르는 중요한 잣대라고 할 정도다.
우리가 흔히 '세력'이라 부르는 그들은 남보다 한발 빨리 정보를 입수하는 것은 물론 거짓 정보를 흘려 공매도에 유리하도록 시장을 조작하기까지 한다.
여의도 증권가에 속칭 '찌라시'라 불리는 B급 정보지가 매일 나돈다.
여기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온갖 루머와 한 발 빠른 정보들이 뒤섞여 있다.
한번 생각해 보라.
어떤 기업에 대한 고급 정보나 시장을 교란하기 위한 거짓 정보가 발표되기 전에 거기에 맞춰 매수나 매도쪽으로 거래를 미리 준비한 자와 오로지 차트상 주가 흐름에만 촉을 집중하는 사람 중 누가 더 유리하겠는가.
위에 언급한 에피소드와 같이 국내외 주식시장은 스포츠 경기처럼 반칙 즉시 심판의 휘슬이 울리는 공정한 경기장이 결코 아니다.
알게 모르게 불법과 탈법이 활개 치고 들통나더라도 배부르게 먹고 수년이 지난 이후다.
뒤늦게 전모가 밝혀지더라도 당시 피해를 본 투자자들은 1원도 보상받지 못하는 구조다.
게다가 첨단 매매 알고리즘으로 무장한 로봇트레이더가 점점 더 영역을 확장해 가고 있는 것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미국의 경우 2009년에 이미 전체 거래의 4분의 3 정도가 기계에 의한 알고리즘 거래였고 2015년경에는 최소한 90%가 넘었을 것이라고 한다. ('문병로 교수의 메트릭 스튜디오' 448쪽)
시대의 큰 흐름이 그러한 이상 한국도 그 비율이 점점 더 높아질 것은 자명해 보인다.
독자 여러분중 일부는 이미 초단타매매를 해 보신 분도 있을 것이다.
점찍어 놓은 종목을 매수하려고 호가창을 보고 주문을 넣으려고 하는 순간 매도호가를 뭉턱뭉턱 먹어가며 주가가 순식간에 저만치 떠올라가 버리는 바람에 매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거나, 반대로 이 정도 수익이면 됐다 싶어 매도가격 정하고 있는 사이 어디선가 갑자기 매물폭탄이 쏟아지며 매수호가를 주르륵 끌어내리는 바람에 그동안의 차익이 도루묵이 되었던 경험이 있다면 보이지 않는 로봇트레이더나 전용선까지 갖춘 전문 스캘퍼에게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초단타매매 로봇은 마치 가위바위보 로봇처럼 인간이 매수주문을 내면 그 주문을 읽고 그보다 빨리 매수주문을 넣어 낚아채고 매도주문을 내면 그보다 빨리 로봇이 매도주문을 먼저 내서 새치기를 할 수 있다.
마치 답을 보고 시험을 치는 것과 같이 주식거래로 수익을 긁어 들이는 게 그들에겐 누워서 떡 먹기와 같다.
매일경제신문 2017년 2월 3일 자에는 "시장은 조작됐다 (The stock market is rigged)."라는 헤드라인으로 이러한 약탈적인 초단타매매(High Frequency Trading)에 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해 상세히 보도했다.
그 기사에 의하면 초단타매매업체와 트레이더들은 컴퓨터 알고리즘을 이용한 선행매매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1000분의 1초인 밀리세컨드, 또는 100만분의 1초인 마이크로세컨드의 차이로 일반 트레이더들의 주문을 먼저 읽고 새치기 주문을 내는 것이다.
미국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매크로 예매와 비슷한 수법이 사용되고 있었다.
증권사는 잦은 거래를 하는 스캘퍼들로부터 많은 수수료 수입을 거둘 수 있고 스캘퍼는 증권사로부터 전용선을 연결받아 일반투자자보다 더 빠른 매매를 할 수 있는 속도전 무기를 제공받는 것이다.
그런 무기를 갖지 않은 순진한 일반 트레이더들은 늘 뒷북만 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캘퍼의 전용선을 이용한 빠른 주문이 불법이냐 합법이냐를 놓고 수년 전 논란이 있었지만 불법은 아닌 걸로 넘어갔었다.
어쨌거나 이런 게 현실이라면 일반 트레이더들은 절대 불리한 게임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굳이 그들의 호갱이 되어 승산 없는 게임에 참여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알파고와 알파고 제로 같은 무시무시한 인공지능들이 주식시장에 본격적으로 출현할 날도 머지않았다.
어쩌면 이미 알고리즘 로봇 수준을 넘어 인공지능을 장착하여 거래에 임하는 곳도 어디엔가 분명 있을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의 결투에 대해 익히 들어봤을 것이다.
갑옷과 무기로 중무장한 거구의 골리앗과 달랑 돌 던지는 기구뿐인 양치기 소년 다윗의 대결이다.
다윗은 골리앗에게 유리한 근접전으로 싸우지 않았다.
그랬다간 백전백패임을 잘 알기에 다윗은 거리를 두고 자신의 특기인 돌팔매로 골리앗을 쓰러뜨렸다.
첨단 시스템으로 중무장한 기관들의 트레이딩 로봇과 정면 대결하는 것은 분명히 어리석은 행동이다.
24시간 잠들지 않고 매매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요인에 즉각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 괴물들과 별다른 무기도 없이 겨뤄야 하는 개미투자자들은 절대 불리할 수밖에 없다.
난타전을 벌이는 트레이딩의 영역은 로봇들끼리 대결하도록 놓아두고 인간이 더 우세한 영역에서 싸워야 한다.
다윗의 돌팔매 기구처럼 다행히 우리에겐 '시간'이라는 긴 끈과 돌처럼 단단한 '운용전략'이 있다.
우량한 기업의 주식으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최소한 2년 3년 보유하면서 자산배분 전략을 시행한다면 로봇들의 난투장을 벗어날 수 있다.
주가가 단기적으로는 로봇과 트레이더의 혈투로 인해 급등락을 반복할 수는 있으나 주인을 따라 산책하는 개처럼 주가는 장기적으로 우상향 하는 기업가치를 따라간다는 건 절대불변의 진리다.
불법과 합법의 회색지대를 넘나들며 땅 짚고 헤엄치듯 이익을 취하는 불공정한 세력들이 법의 심판을 받아 이제는 모두 소멸되었을까?
아니면 앞으로도 꾸준히 지능적으로 더욱 진화해 나갈 것인가?
이에 대한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
*블랙 에지 (BLACK EDGE) - 실라 코하카 저, 윤태경 역, 서울파이낸스앤로그룹, 20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