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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우 Jul 22. 2019

나만의 보라색을 찾았다.

나와 다른 사람들 틈에서 나 찾기

특별할 것 없는 날, 해가 저물고 있다. 파랑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다. 맑은 햇살을 가득 품은 짙은 파랑도 회색 구름과 섞여 희미한 파랑도 모두 좋아한다. 그런 파랑은 하루에 한 번은 꼭 색을 갈아입는데 오늘은 붉은 일몰이었다. 어디선가 쏟아진 빨강이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뻗어나가며 하늘을 군데군데 짙게 물들였다. 파랑과 빨강의 한복판에 서게 된 나는 빨강도 파랑도 아닌 부분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늘 애매모호한 색이었다.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이과를 선택한 나는 곧 이공계와 적성이 잘 맞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부하지 않은 국어와 문학은 늘 좋은 성적을 받았는데 기를 쓰고 매진한 수학이나 과학에서는 늘 고배를 마셨다. 과목에 따른 성적이 어떠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내가 속한 집단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자주 찾아왔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미묘한 것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이 모든 고민을 끝냈으면 좋으련만. 용기가 없었던 나는 이과 적성을 그대로 살려 공과대학에 진학했다. 고민을 공유할 수 없는 천상 이과생들 틈에 둘러싸여 몇 해를 괴로워하고 나니, 그제서야 조금은 공대생 티가 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때 즈음 내게 두드러진 변화가 나타났다. 더 이상 줄글을 쓰지 않게 되었다. 물론 과제가 있다거나 필요할 때는 적었지만 스스로 쓰는 일은 없었다. 마음이 복잡할 때, 한 줄, 한 문단, 한 장으로 완결된 글을 쓰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위로가 되었던 나는 과거로 사라졌다. 길고 밀도가 낮은 줄글보다는 숫자 1,2,3을 앞에 붙여 만든 목록이 더 효율적이게 느껴지고 더 와 닿는 공대생 A가 그 자리에 남았다. 몇 년간의 지겨운 인내와 노력은 나를 제법 구조적인 뇌를 가진 사람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몇 년간 생각할 시간이 아주 많은 시기가 있었다. 더 이상 학생이 아닌 나는 수많은 정의와 공식, 문제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상태였다. 아주 많은 시간이 주어지자 내 뇌는 다시 말랑해지기 시작했다. 머릿속에는 말과 말들, 그리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말들이 마구잡이로 솟아났다. 실타래처럼 마구 엉킨 마음과 생각은 숫자 1, 2, 3의 아래에 묶여지지 않았다. 생각은 문장의 형태로 툭툭 튀어나왔고, 그 말들을 주워다가 받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목록을 적는 사람에서 문장이 필요한 사람으로 회귀했다. 낯설고 신기한 변화를 체감했다. 나는 한 가지를 확신했고 그 확신은 내 용기가 되어 주었다.


나에게는 무한대의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


나는 해가 지는 순간을 너무나 사랑한다. 아름다운 색의 흐름은 시시각각 변해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많은 순간을 놓쳐버린다. 석양은 사람을 빨아들이고 그 자리에 멈춰 세운다. 모든 색이 아름다운 하늘 아래 생각했다. 나는 내가 파랑을 버리고 싶은 파랑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나름의 방법으로 덧입힌 빨강 때문에 파랑을 잃었다며 슬퍼했다. 내가 완성되지 못한 빨강도 아니고 손상된 파랑도 아닌 보라색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주 오랜 시간, 그러니까 그 작은 사실을 알아채는데 10년 정도 걸렸다. 그래서 색채를 지닌 모든 사람, 특히 다른 색 틈에 끼어 자신의 색을 버리고 싶은 사람에게 꼭 말하고 싶다.


당신의 색을 버리지 마세요. 유일하고 아름답습니다.
잠시 가려질 뿐 결코 희석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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