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시대의 통증, 자존감
자존감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자존감은 중요하다. 우리 모두가 그걸 안다. 하지만 동시에는 나는 자존감에 대한 담론이 이토록 거대해지는 것이 조금 피로하다. 예컨대 여기 몇 년째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한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은 몸이 약해 격한 운동을 할 수 없다. 매우 작은 주방이 딸린 원룸에 살고 있어서 요리를 해먹기 힘들다. 잦은 야근과 스트레스에 야식을 먹는 날이 많다. 불규칙한 일정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물론 강한 의지가 있다면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이 목표한 바를 이루겠지만 대개 의지력은 유한하다. 하루 종일 다른 일, 보통은 직장이나 학업에 시달리고 나면 일일분의 의지력은 모두 소진되고 집에 가만히 누워 나머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과 자율의지를 가진 인간이지만 동시에 호르몬 작용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에 불과하다. 위 예시와 같은 일상을 보내는 사람에게 '다이어트 실패는 의지의 문제이니 마인드 컨트롤을 통해 해결해보라'라는 조언은 순간만 반짝이다 곧 사라진다. 자존감도 이와 비슷하다. 상대방을 평가하고 깔보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 틈바구니에 있다 보면 저절로 자존감이 낮아진다. 이것은 마치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극적인 음식이 먹고 싶고, 하루 종일 시달리고 나면 가만히 누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당연한 '결과'다.
인간은 그렇게 진화했다.
자존감은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나'는 대개 관계 속에 존재한다. 인간은 안타깝게도 철저하게 사회적 동물이다. 몇만 년에 걸쳐 무리생활을 하며 진화했다. 나를 존중하는 '나' 가 있으려면 나는 존중해주는 '타인'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주변에 가까운 몇 명이라도 나를 진정으로 존중하고 이해하는 사람이 있어야 외부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를 회복하고 건전한 사고방식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사람마다 편차가 있다. 어떤 사람은 많은 사람의 인정을 받아야 안정감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정말 소수의 지지만으로도 괜찮다고 느낀다. 어떤 사람은 소수의 공격으로도 위협을 느끼지만 어떤 사람은 다수의 공격에도 상처입지 않는다. 그러나 앞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타인의 감정과 평가에 민감한 개체가 더 살아남기 쉬운 생존방식을 거쳐 진화해왔다. 다르게 표현하면 인간은 대체로 타인의 평가에 민감한 존재라는 것이다. 소수가 지닌 둔감함과 강인함을 다수가 꼭 가져야 할 마음가짐으로 강조하다 보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바로 '자존감이 낮은 나'라고 스스로 내린 평가 때문에 더 자존감이 낮아지는 경우다. '여기저기서 그토록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자존감이 낮다니, 나는 문제가 있구나'라는 생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시대가 앓는 통증
하지만 난 아무리 생각해도 너도나도 자존감이 낮아지는 현상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현대사회는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진화하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변화한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계속 낯선 이를 만나 어울려야 하며 나와 너무 다른 타인을 어디서든지 쉽게 접할 수 있다. 우리는 주로 혈연으로 얽힌 작은 집단에서 사교하던 시절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뇌를 가지고 초연결 시대를 살아간다. 주어진 본성과 살아가야 하는 사회가 언밸런스하다. 요점은 자책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일상을 바꿀까
그럼 사람 때문에 괴롭고 스스로를 존중하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괴로운 사람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내 생각은 이렇다. 우선 조금 덤덤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위에 적은 것처럼 시대가 앓는 통증이다. 자존감이 낮아졌다고 해도 그건 일상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가 나쁘게 배열되었을 뿐 내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 외로움은 무슨 통증이든 배가시킨다. 우리 모두가 아팠다 회복하고 아팠다 회복하는 중이라는 위로를 건네고 싶다.
두 번째로 일상의 일부분을 몇만 년 전으로 회귀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 역량에 비해 너무 많은 사람과 교류하고 있다. 내 자존감을 떨어트리는 주범과 쉽게 멀어질 수 있는 상황이라면 당장 멀어져야 한다. 나를 망가트리는 사람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반드시 교류해야 하는 직장동료, 가까운 친구, 심지어 가족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경우에도 최대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는 게 좋다. 상대방을 억지로 이해하려 하거나 스스로를 맞추려 하면 괴로워진다. 함께 있지만 따로 있는 것처럼, 물론 힘들지만 최대한 생각을 안 해야 한다. 뇌는 의미를 만들어 내는 도구다. 일단 머리 안에 집어넣으면 엉터리라도 결론을 내리려 한다. 이런저런 오답으로 머리를 어지럽힐 필요 없다. 나를 망가트리는 사람은 풀어야 할 가치가 없는 문제다.
세 번째로 '나'를 지지하고 이해해주는 사람과 더 많이 교류해야 한다. 이런 사람이 이미 곁에 있다면 더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주변에 없다면 찾아 나서야 한다. 나의 경우를 예로 들면, 공대를 나온 영향인지 주변에 문학을 즐기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글을 더 잘 쓰고 싶은 욕심, 시나 소설을 읽으며 얻은 감동, 생각과 경험을 공유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언어 교환 어플에서 문예 창작과를 졸업하고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친구를 만나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 있고 실제로 만난 적도 없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서로의 미래를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사이가 되었다. 만약 이렇게 저렇게 해봐도 그런 사람을 못 찾았다면 주위를 돕는 일부터 시작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고, 호의와 친절을 베풀자. 그러다 보면 최소한 누구를 멀리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 그 사람은 지금도 앞으로도 당신의 친구가 아니다. 반면 호의를 베풀었던 상대방과 가까워지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상식적이고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내가 어떤 환경에 놓여있느냐에 따라 이 과정은 쉬울 수도 아주 어려울 수도 있다. 그래도 마음의 여유가 되는 데까지 계속 시도해봄직한 일이다. 나를 위해, 그리고 나와 비슷한 누군가를 위해.
사람은 불완전하고 삶은 유한하다.
사람은 원래 불완전한 존재다. 누가 봐도 완전한 존재라는 불가능한 목표를 좇을 것인가, 나의 부족한 부분을 이해하고 나의 장점을 인정해주는 이들과 교류하며 살 것인가 두 가지 갈림길에 놓여있다. 누구나 어제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기 마련이고 그래야 마땅하다. 하지만 자존감 문제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너무 높은 목표를 세우고 있어 오히려 조금 힘을 빼라는 조언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당연히 두 번째 길을 갈 것이다. 삶은 유한하다. 여백이 그리 많지 않다. 이것저것 들여놓다 보면 금세 창고가 되어버린다. 정말 누군가의 창고로 내 삶을 다 소모해 버려도 괜찮은지 묻고 싶다. 대답은 무조건 '아니오'다. 그렇다면 내 영역과 삶을 분명히 지켜내는 단호함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