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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타인 Head 4 08화

별일없이산다

무사히 오늘을 살아낸다는 것.

by 타인head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새벽에 잠에서 깨는 날이 많아졌다. 침대에서 부스럭거리면 그 소리를 어떻게 들었는지, 그새 두 고양이들이 '야용' 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옆에서 자는 신랑을 깨울까 싶어, 재빨리 침대에서 나와 고양이들을 데리고 부엌으로 간다. 고양이 아침밥을 챙겨주고 부엌으로 와 커피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리고, 창문 블라인드를 3분의 1 정도 올린다. 딸, 신랑, 나 이렇게 점심 도시락을 후다닥 싸고 나면 다시 안방으로 가서 샤워를 하고 하루를 준비한다. 요즘은 새벽에 요가를 가는 날이 하루 이틀 정도 있어서 이 루틴이 깨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매일 아침의 루틴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딸은 학교로 걸어가기 위해 집을 나서고, 신랑과 나는 각자 차를 몰고 회사로 출근한다. 하루를 마치고 정신없이 집에 가서 딸을 픽업해 방과 후 활동 장소로 내려준다. 한시간 내외 수업이 끝나고 집에 와서 저녁을 준비하고 세 가족이 다시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는다. 식탁 위엔 늘 크게 특별할 것 없는 반찬들이 놓이지만, 따끈한 밥 한 공기와 가족이 함께 앉아 오늘 있었던 얘기를 나누는 대화가 하루의 가장 든든한 순간이 된다.


장기하 노래 중에 ‘별일 없이 산다’라는 가사처럼, 별다른 걱정 없이 이렇다 할 고민 없이 하루하루가 흘러간다. 특별할 것 없는 하루지만, 특별한 이벤트 없이 소소하게 하루를 시작하고 또 하루를 마감하는 것에서 오는 안정감이 있다.


매일이 별일이었던 어린 시절을 겪어서 그런지, 사람이 하루를 별일 없이 보내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이사를 수없이 다니고, 아버지를 차 사고로 잃고, 몇 년 후엔 큰언니가 급성 신부전증으로 쓰러져 병원과 집을 오가야 했다. 또 몇 년이 지나 할머니께서 치매 판정이 내려졌을 때는, 준비된 폭탄이 순서대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의 인생의 초반은 그렇게 늘 무언가 ‘별일’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별일 없음’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때는 늘 내일이 두렵고, 평범한 하루가 오히려 낯설었는데, 이제는 별일 없는 하루가 가장 큰 선물이라는 걸 안다. 평범한 아침, 반복되는 저녁 식사, 소소한 가족과의 대화 속에야말로 삶이 고요하게 자리를 잡는다.


지금 하는 일도 큰 사회적 부와 명예 같은 화려함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책임을 지고, 누군가의 하루에 작은 도움이 되고, 나와 가족이 함께 살아가는데 밑받침이 되어 준다. 눈부신 성취는 아니어도, 그 안에서 충분히 의미를 찾고 감사할 이유를 발견한다.


나이가 들어보니, 별 일이 없이 산다는게 오히려 별 일이 많게 사는 것보다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별일 없이 산다는 건 지루함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평안하다는 뜻임을 마음 깊이 느끼게 됐다. 별일 없는 오늘이 쌓여 나의 시간이 되고, 그 시간이 모여 결국 나의 삶이 된다.


오늘도 별일 없이 하루 아침의 루틴을 보내고 책상 앞에 앉아, 많이 생각하고, 읽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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