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내 주위를 맴도는 그것.

by 승민

독립영화 ‘바람의 언덕’을 준비하며 하며 시간이 겹쳐 상업영화를 들어갈 기회를 놓친 적이 있다. 주위 동료들은 하나같이 상업영화를 택하지 왜 독립영화를 택했냐며 아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독립영화의 출연 약속을 미리 했던 터라 더 좋은 기회가 왔다고 해서 물릴 수 없었다. 그렇게 아쉬움은 그날 하루로 털어버리고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으로 촬영에 임했고 그곳에서 또 한 번의 기회와 조우했다.


촬영 중 현장에 있는 스텝에게 다른 독립 장편영화의 오디션 제의를 받은 것이다. 무려 주인공의 역할로. 무사히 예정된 촬영을 마치고 도착한 오디션 장소. 이미 마음의 준비는 끝냈던 터라 의연하게 일어나 차분히 오디션을 마쳤고 결과는 일차 합격이었다. 나를 포함해 단 2명의 경쟁자가 최종 오디션에서 판가름이 난다는 소식을 들었고 아직 합격의 기쁨을 맛보진 않았지만 기회를 주신 분에 대한 감사함과 스스로의 대견함으로 그날 하루만큼은 세상에서 둘도 없는 행복한 사람으로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 시각 또 다른 상업 영화의 오디션 제의가 들어왔다. 이게 무슨 일인가? 정말 기회는 한 번에 다가온단 말인가? 그간 꾸준히 준비해나가며 상업영화의 오디션을 한 번만이라도 보았으면 했던 절박했던 나에겐 최근에 벌어진 연속된 오디션은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엄청난 일이었던 것이다.

차례로 다가오는 오디션의 디데이. 준비했던 시간들과 다르게 오디션은 짧은 시간 동안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마치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려온 아이가 막상의 당일이 되자 왠지 모를 상실감을 느껴버리는 것처럼. 이제 남은 것은 결과 발표. 말로는 신경 안 쓴다고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온갖 상황들이 그려지고 있었다.


첫 번째 둘 다 붙었을 경우.

두 번째 둘 중에 하나만 붙었을 경우.

세 번째 둘 다 떨어졌을 경우.


그리고 무엇보다 세 번째의 생황에 집중하려 애썼다. 최악의 상황이 찾아오더라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인지라 첫 번째와 두 번째 경우를 더 많이 상상해 본 것 같다. 정말 이번에 된다면 그간의 설움을 날려 버릴 수 있을 것 같고 무엇보다 부모님께 당당할 내 모습을 생각하니 마음이 부풀어 올라 얼굴마저 벌게졌다. ‘아차차. 아직 된 것도 아닌데. 다시금 최악의 상황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자’며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이미 살짝 넘보았던 청사진의 아름다움을 지워버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설레었던 시간들이 지나고 드디어 결과 발표의 순간. 로또의 당첨번호를 체크해보는 사람처럼 초조함과 두근거림 반으로 연락을 받았다. ‘감독님께서 고민이 많으셨지만 이번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음 기회에 꼭 더 좋은 작품으로 만나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로 젠 듯 정확하고 깔끔한 답변. 둘 다 말이다. 어쩜 이유도 이리도 같은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고 오히려 상대방이 미안해할까 염려스러워 밝은 목소리로 화답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일장춘몽이 이런 건가 싶었다. 허무함과 상실감, 아쉬움과 미련으로 한동안 멍한 상태로 있다가 문득. ‘이렇게 오디션을 본 게 어디야. 기회는 정당하게 왔고 그 기회를 잡기엔 아직 부족했던 내 실력이 문제지. 아쉬워해서 달라질게 뭐람.’ 현실을 받아들이니 마음이 편하고 홀가분해짐을 느낀다. 그리고 그간 연락을 기다리며 타들어갔던 마음을 들여다보면 난 아직 난 멀었다 싶다. 자신을 믿고 준비가 되었다면 중심을 갖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쉽사리 휘청이지 않았을 텐데.. 더욱더 안과 밖을 정진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리스 시라쿠사 거리에는 동상이 하나 서있다. 그 동상의 모습은 앞머리에는 머리숱이 무성하고 뒷머리는 대머리인 데다가 발에는 날개가 있는 이상한 모습이다. 관광객들은 이 동상을 보고 처음엔 모두 웃지만 아래의 글을 보고 많은 감명을 받는다고 한다.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보았을 때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고,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내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다시는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발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함이다. 나의 이름은 기회다.'


기회는 언제나 곁에서 맴돌고 있고 그를 알아차리고 붙잡으려 할 땐 쉽사리 등을 내어주지 않으며 쉽게 사라진다는 위의 말은 참으로 공감이다. 앞으로 다시 만날 그 ‘기회’를 위해 그의 앞머리를 잡을 수 있는 단단한 악력과 대머리인 그의 뒷머리를 잡긴 어려우니 그를 따라잡을 수 있는 지구력과 그가 사라지면 그를 찾을 수 있는 현명함을 길러 다시금 그와 대적하고 싶다. 살면서 3번은 찾아온다는 기회. 3번이든 4번이든 순순히 붙잡혀 주지 않을 걸 알고 있다. 하나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나의 굳건한 신념으로 그와의 선의의 경쟁을 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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