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술이 취하면 기분이 좋으셨다. 술 취한 아버지에게서는 시큼하고 달착지근한 짙은 냄새가 났는데 나는 그것을 홍시 감 냄새라고 표현했다. 어린 나는 그 홍시 냄새를 좋아했다. 평소엔 엄격하셔서 동네 꼬맹이들로부터 호랑이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아버지는 달라졌다. 늘 그런 건 아니었지만 술 취한 아버지는 가끔 노래를 불렀다.
피리를 불어 주마 울지 마라 아가야
산 넘어 고개 넘어 까치가 운다
고향 길 구 십리에 어머님을 잃고서
너 울면 저녁별이 숨어버린다
<아주까리 등불>이라는 제목의 이 흘러간 노래를 우리 형제들이 어려서부터 유일하게 알고 있는 걸 보면 아버지가 꽤 자주 부르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과묵한 편이었지만 꾸지람을 아끼지 않는 분이었기에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를 어려워했다. 살가움과는 거리가 먼 분이었다. 아버지가 맨 정신으로 노래를 부른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주까리 등불>은 술 취한 아버지가 가슴속에 감춰둔 그리움을 참지 못하고 터트리는 신음 같은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른이 돼서야 깨달은 사실이다.
아버지는 일제의 강제징용을 피해 고향을 떠났다가 해방되던 봄에 모친을 만났고 그리고 곧 헤어져 다신 만나지 못했다. 아버지 나이 20살 때였다. ‘어머니가 만주 누님네 가는데, 차비하라고 몇십 원 드렸더니 나중에 보니 그 차비를 나 쓰라고 그대로 두고 가셨더구나.’ 아버지는 회상하곤 했다. 아버지의 누님은 황해도 개풍군으로 시집갔는데 나중에 가족이 모두 만주로 옮겨갔다고 한다. 누님은 아버지에게 유일한 혈육이었다. 살아생전 모친과 누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 당신 평생의 한이었다.
아버지는 노랫말을 읊조리면서 눈물도 흘렸으리라. 나는 아버지의 눈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아버지가 한 번도 울지 않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남몰래 뼈아픈 통곡을 하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경기도 한 지역 집성촌의 꽤 괜찮은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3살에 부친을 여의면서 인생의 방향이 달라졌다. 어린 시절의 고생, 젊은 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격어야 했던 파란의 인생 여정을 토막토막 단편적으로 말하곤 하셨다.
아버지는 당신의 고뇌를 무심한 듯 이야기로 흘리곤 했는데, 그것이 고뇌였고 슬픔이었다는 사실을 그 당시엔 몰랐다. 아직 속이 덜 찬 내게 아버지는 그저 단순히 아버지일 뿐, 잔인한 세월을 지나 위험한 다리를 건너듯 아슬아슬 삶을 이어가던, 한 인간으로서의 애통함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바다 밑 속처럼 깊은 아버지의 가슴 저 밑바닥에 고인 피맺힌 그리움, 절망, 이루지 못한 희망, 외로움이 얼마나 컸을지 나중에야 알았다. 살아계실 때 아버지의 노래를 이해하지 못한 나 자신이 통탄스럽다.
고향 길 구 십리에 어머님을 잃고서
너 울면 저녁별이 숨어버린다
아버지가 참았을 눈물이 내 눈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