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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늘 아래

아버지의 노래 3

by 민들레


아버지를 떠올리면 겨울바람 스산한 차가운 골목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가슴이 시리다. 아니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상상된다. 아버지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좌우의 대립이 극렬했던 나라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남몰래 숨기고 모친과 누이의 생사도 모른 채 전국을 떠돌았을 아버지.


그렇지만 아버지는 내게 그냥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인생에 대해 객관적으로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내 나이 반평생도 넘어서야 비로소 아버지라는 분의 인생 여정이 사실적으로 다가오면서 내 안에 연민의 물줄기가 흐르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이제라도 당신의 굴곡진 인생을 되짚어 보게 되었다.

우리 형제들이 자랄 때, 아버지는 24시간 라디오를 켜 놓았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곳은 가난한 시골마을이었기에 아마 우리 집은 라디오를 가진 몇 안 되는 집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한다. 우리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라디오 소리를 들으며 잠들고 잠이 깨었다. 어머니는 크리스마스이브 날 0시에 넷째 동생을 집에서 출산했는데 동생이 태어나면서 막 울음을 터트림과 동시에 라디오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라는 맨트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그 동생이 지금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어찌 됐건 태어나는 순간 축하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가 집에 계실 때면 시도 때도 없이 틀어놓는 라디오 덕분이었다.

아버지가 켜놓은 라디오는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어 우리 형제들은 밤에 잘 때는 물론 공부할 때도 방해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덕에 나는 흘러간 가요를 거의 암기했고 새로 나온 가요도 친구들 가운데 가장 먼저 익혀서 부르곤 했다. 내가 아나운서 목소리나 방송 내용을 잠깐 듣고서도 어느 방송사인지를 알아맞히면 아버지는 똑똑하다며 기특해하셨는데, 그것은 때 없이 흘러나오는 방송에 노출되다 보면 누구나 가능한 일이었다.


새벽이나 늦은 밤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중국 흑룡강성, 만주국 00구, 길림성, 사할린, 카자흐스탄, 하얼빈시, 연해주 등등과 같은 낱말을 날마다 들었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과 강제 징용 등으로 해외에 흩어진 동포들 소식을 서신을 통해 전하는 방송이었다. 아버지는 행여 방송을 통해 들려올지도 모를 모친과 누님 가족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을 것이다. 아버지가 그토록 열심히 방송을 청취한 것은 두 분 소식을 듣고 싶은 간절한 열망이었다. 바람결에라도 소식을 들을 수 있기를 염원하던 아버지의 절절한 심정을 당신 말고 누가 알았으랴.


아버지의 유일한 혈육인 단 한 분의 누님, 그러니까 나의 고모 되는 분은 지금의 황해도 개풍군 권 씨 댁으로 시집갔는데 뒤에 북만주로 가족이 옮겨갔다는 소식을 아버지는 들었다. 광복 후에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서 아버지가 가보았으나 집이 비어있어 사람을 만날 수 없었고 이후에 남북 분단으로 인해 모친과 누님의 소식은 영영 두절되었다.


모친은 어느 하늘 아래 계시는지, 살아계시기나 한 건지, 누님 가족은 만주에서 정말 돌아왔는지, 돌아왔다면 사는 곳이 북쪽인지 남쪽인지 가늠 초차 안 되었다. 무심한 세월은 흘러 당신도 늙어갈 무렵, 아버지는 조금씩 체념하기 시작했다.

“네 할머니 연세가 올해 80이니 어디에 살아계셨더라도 이젠 세상을 뜨셨을 거야.”

그러나 누님을 만나고자 하는 바람은 버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같은 말을 여러 번 하셨다.

“시집간 누님이 친정에 오던 날, 누님이 나를 보자마자 얼마나 반가웠던지 번쩍 둘러업더구나. 그때 내 나이가 8살이어서 업어줄 나이도 아니었는데 ”


아버지의 다른 말도 생각난다.

“한 번은 누님 집에 갔는데 감춰두었던 맛있는 것을 매형 몰래 내게 주면서 얼른 먹으라고.......”

아버지는 덤덤한 듯 말했으나, 누님에 대한 그리움이 아버지 몸에 혈액처럼 차 있다는 것은 그때도 알았다. 그처럼 애틋하던 두 남매가 생사조차 알 수 없었으니 얼마나 한이 되셨을 것인가.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일 년 전쯤 내게 고모네 가족이 살던 주소와, 고모와 고모부는 물론 그 가족의 이름까지 알려주었다. 아마도 북한에 계실 것이니 나중에라도 통일되면 찾아보라고. 고모와 고모부가 돌아갔으면 그 자손이라도 만나보라는 당부를 하시면서. 나는 아버지가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었다. 고모가 살았던 북한의 황해도 개풍군과 만주국 상강성 주소, 고모부의 형과 동생 등 총 8명의 이름을 꼼꼼히 기록했다. 뒤늦게 궁금했다. 아버지는 어떻게 그 오랜 세월 동안 매형의 형님 아들과 그 친척들 이름까지 기억하고 계셨을까. 아버지의 절실함과 기억력에 감동하면서, 그 그리움과 고통이 체감되는 것 같아 마음이 쓰렸다.


나의 고모 이름은 심규란, 고모부 이름은 권연성 씨라고 한다. 내가 죽기 전에 그분들의 자녀, 즉 나의 고종사촌이라도 만나 고모님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아버지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드리는 일이 될 수 있을는지....... 아버지가 기다리던 통일은 아직도 요원한데, ‘통일되면’을 되뇌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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