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으로 가는 문
봄을 기다리는 회색빛 나무들 살갗 위로 햇살이 길게 펼쳐져있다. 아직 겨울을 채 털지 못한 나무들이 피부를 간질이는 햇살에 몸을 맡기고서 조용히 서있다. 나무들이 드리운 긴 그림자가 제 주인을 닮았다. 그림자도 실재 나무처럼 보인다. 나무와 그림자의 구분이 어렵다. 나무 그림자가 그 나무의 정취를 더해주는 듯도 보인다.
종종 그림자는 사람의 눈과 마음을 매료시킨다. 허상이면서 실재 같은 그림자는 고독하면서도 신비한 매력을 내포하고 있는 것만 같다. 나는 그림자의 몽환적인 힘에 끌리는 때가 자주 있었다. 비 개인 날, 길을 걷다가 비 웅덩이에 비친 나무 그림자를 만나면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들여다보거나, 밤길에 가로등을 등지고 선 가로수 그림자를 따라 걸을 때의 기분에 몰입돼보기도 한다.
그림자 하면 떠오르는 심리학자가 있는데,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칼 융이다. 그는 마음의 구조를 통해 인간 무의식에 숨겨진 그림자에 대해 밝히고 있다. 그림자를 ‘무의식의 열등한 성격’으로 보았다. 누구든 자기 마음속 그림자를 이해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미성숙한 ‘자아’일수록 자기 내면의 그림자를 인식하지 못하며 마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한국 분석심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이부영 박사는 저서 <그림자>에서 “용기를 가지고 그림자를 대면하고 이를 통과하고 지나야... 성숙한 마음에 이른” 다고 하였다.
그림자는 타인에 대한 투사를 통해 나타난다. 내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다. 나는 비타협적이며 독단적인 사람을 특히 싫어한다. 물론 그런 사람을 좋아할 이는 없다. 그러나 유독 반감이나 저항감 같은 심리가 강하게 일어난다면 자신의 그림자를 상대에게 투사했을 확률이 높다. 내 안의 그림자(‘독단성’)를 인정하고 싶지 않으므로 상대에게 투사하고서 그를 비난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림자의 투사 현상이다. 자기 무의식의 그림자를 부정하지 않고 의식화하여,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한다. 자기 마음을 성찰하여 그림자를 인식하고 깨닫는 것이 자기실현(성숙)으로 가는 첫 관문이라고 하였다.
다른 각도에서 보는 그림자 이야기가 있다. 불교설화 가운데 ‘원숭이와 우물의 달’이라는 내용이다. 숲 속에 500마리의 원숭이가 있었다. 어느 날 원숭이들은 우물 속에 비친 달을 보았다. 원숭이 대장은 달을 건져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겠다며, 자기가 맨 위에서 나뭇가지를 잡을 테니 나머지 원숭이들은 크기순으로 꼬리를 잡고 매달리라고 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매달린 원숭이가 호수에 손을 뻗어 달을 건지기로 하였다. 하지만 원숭이들이 달을 건지기 전에 나뭇가지가 부러져 한꺼번에 호수에 빠지고 말았다. 호수에 비친 달그림자를 어리석게도 실재의 달로 착각하여 생긴 불행이었다.
또 불교 경전인 <금강경>에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라는 4구게가 나온다. 금강경의 맨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이 게송을 금강경의 핵심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서도 그림자를 말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그림자이며 실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림자를 보며 사색에 빠지다 보니 융 심리학과 <금강경>까지 인용하였으나 융의 그림자와, <금강경>과 ‘원숭이와 우물의 달’ 그림자와는 조금 다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림자를 그림자로 인지하고 자각하여 어리석음을 통과해야만 자아가 전일(全一)의 경지로 가는 길에 들어설 수 있다고 보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른 봄날, 나무 그림자에 시선을 빼앗기다가 그림자와 관련한 심리학적 이론과 불교에서 바라보는 삶의 현상에 대한 가르침 등의 생각을 두서없이 해보았다. 간혹 그림자에 끌리며 무연히 바라보곤 하는 나 자신을 탐색하고 싶었던 듯하다.
심리학에서나 불교 경전에서나 그림자는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자아의 어두운 측면이며 허상에 불과한 그림자를 지혜로 가는 연결점으로 보았다. 그림자가 그림자임을 알아야 한다. 어리석은 원숭이들처럼 호수의 달을 하늘의 실재 달로 믿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맑은 물웅덩이에 비친 조각달이나 나뭇잎 그림자, 또는 아직 봄옷을 입지 않아 단순하고 간결해 보이는 나무 그림자를 오래도록 바라볼 때, 내 무의식에 웅크린 아직 인지하지 못하는 그림자를 생각해야 할 것이며, 실재와 그림자를 혼동하지도 말아야 한다. 어쨌거나, 나무가 그림자이고 그림자가 나무다....... 말장난으로 들릴 말은 그만 두는 게 좋겠다. 그냥 햇살과, 공기와, 바람과, 그림자를 느끼며, 오래도록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