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산책하는 것이 좋았다. 원래 관찰력이 없는 나는 무관심한 행동 때문에 남편으로부터 타박을 많이 받았었다. 무심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관심 밖의 것은 잘 보지 못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남편은 무언가 분명 새로 들어온 게 있다는데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고, 그걸 무관심이라며 서운해하는 남편이 나는 환장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보이지 않는 걸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그때는 남편도 나도 서로 말싸움에 생각을 못했지만 세월이 지나 가만 생각해 보니 아마도 그건 눈은 보고 있었지만 마음이 보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남편으로부터 지적을 받으니 당연 그게 내 잘못인 줄 알았었다. 그래서 늘 주눅 들고 미안했다.
요즘 들어 산책을 하면서, 어설프게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사물에 대한 관찰력이 생겼다. 쓰러져 죽은 나무들, 작은 풀꽃, 구석에서 겨우 피워 낸 꽃잎, 애써 피워냈나 싶으면 힘없이 스러져 가는 꽃, 시기를 놓치고 뒤늦게 핀 꽃, 떨어져 죽은 새, 로드킬 당한 길고양이, 가뭄에 도로가에 나와 말라죽은 지렁이. 단 며칠 절실한 삶을 울며 살다가 죽어 떨어진 매미....... 대부분 아프고 힘든 것들이 내 눈으로 들어와 마음으로 파고들곤 했다. 어쩌면 나는 나보다 위에 피어있고, 날고 있는 것들보다 내 눈 아래 죽어가는 생명들에 더 관심이 많은지도 모른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다음 세상에는 자신이 원하는 존재로 꼭 태어나라고 말이다.
그것이 관심이고 관찰이었다.
물론 예쁘게 핀 꽃들이나 간들리던 목이 긴 강아지 풀이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해, 석양, 노을도 모두 내 기쁜 관심 안이었다. 기쁘게 본 사물은 내면 깊이 오래 머물지는 않는다는 것도 어느 날 알았다.
맛있는 산책을 해 보기로 했다.
봄처럼 향긋한, 여름처럼 뜨거운, 가을처럼 스산한, 겨울처럼 새침한 산책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걸 산책을 하면서 느낀다.
작은 꽃 하나가 안간힘 쓰면서 피워 올린 꽃잎, 그래서 그런지 낮은 자세로 봐야 예쁘다는 걸 알았고, 한눈에 반해 무릎을 꿇어 가면서 까지 보게 되는, 계절마다 색을 달리하는 늘 같은 듯 다른 자연 속에 살고 있는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산책을 하면서. 사진을 찍으면서 꽃을 꺾는 버릇이 없어졌다.
예쁘면 가지고 싶었고, 가지를 뚝 꺾으면서도 미안한 줄 몰랐었다. 때로는 꽃병에 꽂는 것도 잊어버린 채 시들면 버리고, 꽃들이, 풀들이, 나무 하나가 소중한 생명이라는 생각을 깊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제는 다 기특하다. 이제는 다 안쓰럽다. 이제는 다 생명으로 보인다. 그것도 아주 소중한 생명
산책을 하면서 사유의 길을 걸으면서 풀 한 포기의 삶도, 나무 한그루, 꽃 한 송이의 삶도 다 우리와 다르지 않음을 안다.
여리디 여린 연두의 싹으로 시작하나 언젠가는 꽃이 피고 무성한 시절이 온다. 시들어 가는 시기가 있고, 꽃 지고 열매 맺는, 열매 조차 떠나고 결국은 혼자 남는 그런 인생.
산책은 맛있다.
눈을 열고,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걷는 길이라면
어디에서든 맛볼 수 없는 진수성찬의 아주 맛있게 잘 버무려진 진미 맛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산책이 좋다.
산책을 하는 동안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좋고, 그 대상과 마음을 나눌 수 있어서 좋고, 돌아와 다시 떠 올릴 수 있어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