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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소미소 Jan 18. 2023

차를 마시며

메리골드차

지난 초겨울 정성스럽게 만든 메리골드차를 은주가 가져다주었다.

은주는 손재주가 좋아 각종 리폼도 잘하고, 바느질도 잘하고, 손으로 만드는 건 못 하는 게 없다.

외숙모와 조카 사이로 만났지만 인연이란 게 쉽게 촌수가 정리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아직은 아니지만 말이다.


요즘은 점심을 먹고 은주가 준 메리골드차를 우려 마신다.

얼마 전 오른쪽 눈 가에 새까만 실먼지들이 떠다녀 안과에 갔더니 '비문증'이라는 듣기도 처음인 병이라 했다. 주로 50-60대에 많이 나타나는 질환인데 잘 이해는 못 하겠지만 망막 사이에 떠다니는 계란 흰자 같은 것이 노화가 되어 거기 실핏줄 같은 게 생기는데 그게 동공을 조금 막고 있어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약을 넣고 검사를 하고, 또 처방을 받아와서 먹으면서 눈의 피로에 좋다는 이 '메리골드'차가 생각나

요즘은 이 차를 만들어준 은주에게 아주 고마운 마음으로 마시고 있다.


물을 끓여 일정시간 조금 식힌 다음 꽃잎이 든 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금방 노란 메리골드가 몸을 풀자 이내 물이 주홍빛으로 조금씩 짙어진다

색깔이 이렇게도 고울 수가 있을까?

고 작은 꽃송이 두 개가 이렇게 진한 꽃물을 풀어내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다.


꽃물을 하얀 컵 위에 따르니 빛깔이 더 곱다. 새하얀 천을 푹 적시면 금방이라도 오렌지빛 스카프를 만들 것 같다.  한 잔은 과장님께 드리고 또 한잔은 내가 마신다.

그리고 아직 노란 빛깔이 남아 있는 꽃잎에 다시 뜨거운 물을 부어 놓는다


차의 향기는 풀향이 난다. 꽃향기보다는 풀향기에 가깝다. 하지만 그 향기 끝에 메리골드 특유의 향이 남아있다. 살짝 입술을 데어 보니 따뜻하고 부드럽다. 참 신기하게도 꽃잎을 물에 넣었을 뿐인데 물이 이렇게 순해졌다. 몰도 꽃의 향기에 노곤하게 몸을 푸는 것일까?


한 모금 입에 넣으니 입 안이 온통 꽃향기다. 식도가 뜨끈해진다. 금방이라도 눈이 시원하게 밝아질 것 같다.

두 모금, 세 모금, 마실 수록 온몸이 조금씩 데워진다. 뜨끈해지더니 노곤해진다.

물처럼 내 마음도 순해지는 것 같다.


옆방 예쁜 선생님이 집게를 빌리러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우와! 선생님 향기가 참 좋아요!" 한다


단 세 송이의 마른 꽃이 이렇게 큰 일을 해내고 있다. 맛으로, 향기로, 온기로 모두를 점령한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차 한잔을 다 마시고 아까 부어놓은 꽃잎이 든 주전자를 들여다본다

빳빳하던 꽃잎들이 흐물흐물 몸을 풀고는 저희도 노곤한 지 널브러져 있다

마치 출산한 산모처럼 노란 꽃물을 다 토해놓고 기진하듯 누워있다.


언제나 그렇구나!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 또 다른 누군가가 행복하구나

날랜 손에 똑똑 목이 부러지는 고통과 햇볕과 바람에 온몸의 수분을 빼앗기는 목마름과

뜨거운 물속에서 이제 다 포기하고 내려놓으니 우리가 이렇게 좋구나...


미안한 마음에 꽃을 화분 모래 속에 묻어준다.

꽃으로 태어나 줘서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다음 생에는 내가 꽃으로 태어나 줄게, 너는 사람이 되어 나를 마셔주렴


구름 때문에 종일 꿀꿀하던 하늘의 구름을 뚫고

늦은 해가 명징하게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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