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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소미소 Oct 18. 2024

나무의 가을

가을을 불러놓고 슬픔이라 부른다

유난히 나무에 눈이 많이 간다.

어울려 있는 나무보다 홀로 외따로이 있는 나무에게 더 눈이 많이 간다

살아있는 나무보다 죽은 사목을 보면 눈이 더, 더 많이 가고 마음까지 얹는다

옛날부터 생각했는데 나는 슬픈 것들에게 눈과 마음이 더 많이 가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들판의 꽃과 풀과 나무보다는

바위틈이나 아스팔트 깨진 사이, 지붕 위에 위태롭게 자라는 꽃과 풀과 나무에게

더 많은 애정이 간다.

일부러 찾아가 보는 경우도 있고, 변화과정을 사진으로 찍는다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내가 왜 그러는지에 대해서 아무리 생각해 보지만 그 답을 알 수 없다

약간 나르시시즘인 내가 겨우 답을 얻어낸다면 내 마음이 약해서라고 할까?


비가 내리는 오후,

잠깐 소수서원을 산책했다.

아름드리 우람한 소나무를 자랑하는 소수서원이지만 벚나무도 그 못지않게 봄과 가을에 볼거리를 제공한다.

봄이면 화사한 벚꽃이 피고, 가을이면 선혈을 토한 듯 나무가 발갛다. 마치 하늘이 노을을 토해놓은 것처럼, 그 붉은 노을이 나무 끝에서부터 서서히 스며드는 것처럼 나무가 물들어 온다. 우리는 그것을 단풍이라 말한다.

그 벚나무 아래를 산책하던 중이었다. 비가 오니 우산이 필요했고,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오랜만이라 그런지 더 경쾌했다.  흙 위로 타닥타닥 떨어진 빗물 파편이 크게 타원을 그리며 흩어져갔다.

어깨를 겯고 모여있는 벚나무 중에 혼자 외따로 떨어져 있는 벚나무 하나가 내 눈에 박혔다. 다른 나무보다 일찍 물들어 가는 나무, 밑둥치가 근 100년은 살아온 듯 울퉁불퉁 상처가 많은 나무, 그러함에도 다른 나무의 허리춤에도 닿지 않는 나무, 굴곡의 세월과 거친 풍파가 차라리 견고해 보였다. 아니 견고한 척했으나 내 눈에는 안쓰러워 보였다. 그런 나무를 볼 때면 나는 사진에 담는다. 지금까지도 살아있는 모습이 너무 대견해서. 아니 어쩌면 이 모습이 마지막일 것 같아서,  오늘도 나는 그 나무 앞에서 이리저리 앉아서 또는 서서 나무를 사진에 담았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센척하는 남자가 있었다. 조금 불리하다 싶으면 무조건 화를 내는 남자, 무엇이든 명령하려고 드는 남자, 군림하려 하던 남자, 앙다문 입술과 치켜뜬 크지 않은 눈으로 뱁새처럼 좁은 눈을 뜨고 눈망울을 항상 구석에 두던 남자, 그 남자의 눈빛은 평생 나의 두려움이었고, 불안함이었고, 오금 저려 도망치지 못하는 내 발목의 투명한 족쇠였다. 사랑했지만 두려워했던 남자.

그랬던 그 남자가 거기 바로 거기 서 있었다. 그 나무 곁에 서있었다. 여전히 앙다문 입술에 뱁새눈을 하고, 뜨거운 여름 햇살에 퇴색되어 버린 듯 숱 없는 하얀 머리를 흐트리고,

안쓰러웠던 나무가 갑자기 두려워졌고, 가슴이 벌렁거렸고, 이내 나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가 나무의 정령이 된 걸까? 그럴 리가 없지, 그가 죽기 전부터 이 나무에는 분명 정령이 있었을 텐데, 사람이 죽으면 나무의 정령이 되는 걸까? 그런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떨군 눈빛 아래로 퇴색된 낙엽 한 잎이 굴러왔다.

사사락 소리에 고개를 들고 눈을 떴다. 바람이 마법을 부린 듯 눈빛이 무서운 남자는 떠나고 없었다. 대신 뒤돌아서 떨어진 낙엽을 쓰는 한 남자가 보였다. 어깨가 조금 쳐진 남자, 잔기침을 쉼 없이 하는 남자, 그러다가 힘이 드는지 잠시 비질을 쉬는 남자, 그래 저 모습이었지, 내가 좋아했던 모습, 꿈꾸던 모습, 그리고 그리워한 모습, 가을이면 아침마다 앞마당 벚나무 이파리를 단 한 잎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쓸던 남자,

문득, 그 남자가 그리웠다. 저 나무처럼 험한 숙명에 환해지지 않은 인생, 스스로의 고집을 둥글게 말지 못해 뾰족한 가슴으로 고심에 빠져 희망이 자라지 못하던 남자, 세상에 긍정은 없다고 부정을 추앙하던 남자, 칭찬은 사람을 망하게 한다며 늘 비난에 익숙한 남자, 아니 비난 받으며 자라 칭찬의 기쁨이, 칭찬이라는 보약이 마음에 꽃을 피우는데 얼마나 큰 영양제라는 걸 모르는 남자,

가여운 그 남자의 허리를 가만히 감싸 안았다. 모른척 하는 남자가 입술 밖으로 쿨럭거리며 뱉아내는 기침에 내 몸이 따라 박자에 맞춰 흔들렸다. 기침이 멈추면 비질을 하는 남자, 사락사락 비질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린다. 눈을 감는다. 그래 이렇게 기억하자. 오래 기억하자. 오로지 이 모습만.

가슴은 차가웠지만 등은 다정한 남자.


이제 이 나무를 그 남자의 나무라고 칭할까? 그러고 보니 나무를 닮았네 그 남잔. 그래서였을까? 나무 아래 앉기를 좋아하고, 나무 심기를 좋아하고, 나무를 태우는 걸 좋아하고, 또 나무 아래를 쓰는 걸 좋아하던 남자.

분명 그는 나무의 정령이 되었을지 몰라. 나보다 나무를 더 사랑했으니,


나무가 운다. 흐느낀다. 들썩이며 운다. 눈물 뚝뚝 흘리며 운다. 우산을 내리고 나도 함께 운다. 우는 걸 싫어한 기억이 나 숨을 죽이고 운다. 눈물도 감추려고 방울방울 맺히면 꿀꺽 침을 삼킨다. 신기하게 눈물은 다시 눈물샘으로 들어가 식도를 타고 짭조름하게 넘어간다. 나무의 우는 모습을 안 보려고 등을 돌렸다. 부끄러워할 거야. 늘 울지 말라고 했으니까. 부끄러울지 몰라. 뒤돌아 걷는데 그제야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꺼이꺼이 목젖이 터졌다. 나무와 내 흐느낌이 하모니가 되어 귓불을 타고 흐른다.


바보야!

우는 건 이런 거야.

이렇게 우는 거야.

뒤돌아 오면서 우는 걸 싫어하는 나무에게, 그래서 우는게 서툰 나무에게 나는 처음으로 우는 법을 가르쳤다.


빗소리가 요란타

나무는 아직도 울고 있으리라

내가 떠난 뒤에도 오래 흐느끼고 있었으리라

평생 울지 못한 울음을

오늘 우는 법을 배웠으니 다 쏟아내고 울고 있으리라

그래야 한다

주룩주룩, 추적추적, 가랑가랑

다시 주룩주룩, 추적추적, 가랑가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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