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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미 Oct 30. 2018

깊은

어제는, 약속 시간에 삼십 분이나 일찍 나갔다. 식당 주위의 깊은 가을을 걸었다. 낙엽들은 똑똑 내 구두를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시간이 남아서 갤러리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만난, 그림이 참 좋아서 가져온 포스터를 방문에 붙여두었다. 


남설 작가였는데 롤랑바르트를 좋아한다고 했다. 성별을 알 수 없는 사람 둘이 쌍둥이처럼 꼭 붙어 있었는데 그게 마치, 나와 나처럼 보였다. 어쩌면 선과 악, 어쩌면 나와 내 영혼, 유일하게 끌어안을 수 있는 나. 라는 생각. 나와 나의 거리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았다, 손이 닿고 숨소리가 들릴 그 정도 거리에 두 사람이 (두 사람처럼 보이는 한 사람) 있었다. 


<모리스갤러리>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orrisart&logNo=221383770852


점심에 만난 언니는 얼마 전에 수술을 했고, 프로포폴을 너무 많이 맞아서 (마취가 중간에 풀려서) 후유증으로 고생했다고 했다. 언니에게 아이가 있는데, 언니는 보호자인데, 그러나 언니는 보호가 필요하다. 언니에게 줄 것이 없어서 받은, 차가버섯을 주섬주섬 챙겨 나갔다. 


언니 이거 가루 내서 물에 타 먹어도 되고 요리에 넣어 먹어도 된대. 암에 좋대.


언니와 나는 세 시간 넘게 수다를 떨고 그러고도 말을 다 끝내지 못했고, 언니는 계속 기침을 했고,

식전 약과 식후 약을 삼켰고, 우리는 똑같이 미래를 걱정했고, 그러다가 언니는 

 3시간 연속 강의를 하러 깊은 가을로 떠났다.


우리의 30대를 얘기했다. 시에 미쳐서 매일 쓰고 서로의 시를 봐주고, 비밀처럼 소곤소곤 사람에 대해 얘기하고 사랑에 대해 얘기하고, 늘 거기 있었던 언니. 우리는 지금 시인이 됐고, 각자의 시를 쓴다. 

언니는 언니대로 나는 나대로 바빠 자주 보지 못하지만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 안심이 되는 언니. 언니가 건강했으면 좋겠다. 언니는 이제 참지 않는다고 했다. 소리도 지르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한다고. 살고 봐야겠다고. 참고 있다가 병이 됐다고 했다. 언니의 병은 속에서 왔다. 살과 근육과 마음이 굳어서 안으로, 안으로, 가장 연약한 부분부터 파고 들어왔다. 언니는 수술실에서 고통을 파냈다. 그러니 이제, 안 아팠으면 좋겠다.



언니가 가고, 어디에 가서 일을 할까 시를 쓸까 하다가 오전에 받은 문자가 떠올랐다. 11월 2일까지 원고 마감 준수해주세요! 도서관으로 가서 채록을 풀고 시를 썼다. 배에서 소리가 났다. 저 깊은 어딘가에서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 있다. 배가 고픈 것도 아픈 것도 아닌데, 배에서 자꾸 소리가 났다. 도서관에 울려 퍼졌다. 그걸 받아쓰자 생각하고 시를 썼다. 몇 주를 잡고 있어도 완성되지 않던 시였다. 오래 생각하며 세 번쯤 베껴 쓰고 나니, 됐다 싶었다. 시가 완성되는 순간, 불안이 사라진다. 됐다 싶을 때는 몸에 힘이 풀린다. 단박에 써지는 작품이 그럴 때도 있고 여러 번 고쳐 써도 그렇지 않은 시가 있다. 그래도 어제는 됐다 싶었다. 그래서 또, 숨 쉰다. 


아침에 일어나 호흡을 했다. 명상하면서 들이쉬고 내쉬고. 저 속에서 딱딱하게 굳어 있는 마음들에게 가 닿는다는 상상을 하면서, 금강에, 소나무를 스치고 온 공기가 내 코로 들어와서, 깊이 들어간다. 


안녕. 너 여기서 혼자 있었니? 무서웠니? 숨도 안 쉬고 숨어 있었니? 


말을 걸면서, 끌어안고, 끌어안아서, 점점 작아지고, 따뜻해져서 다시 코로 나온다. 다시 소나무에 가고 저 금강으로 가고 깨끗해져셔 다시 온다. 명상은 생각을 비우는 거라는데, 계속 떠오른다. 눈을 감으면, 더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아침마다 명상을 하면 아니 명상 비슷한 걸 하면, 마음이 녹는다. 몸도 녹는다. 나는 가벼워진다. 그렇게 또 하루 산다.  내가 나를 만난다. 어제 만난 작가의 그림처럼, 나와 나가 만나서 안아주고 알몸으로 안아서 따뜻하게 딱딱한 마음을 녹여 밖으로 데리고 온다. 


어젯밤에 문자가 한 통 왔다. 펀딩을 통해 반려 나무를 입양했는데 그로 인해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이 조성된단다. 반려 나무 부모의 이름이 손미 로 각인된다고. 반려나무 부모의 이름. 나는 먼 곳에 심어질 나무의 부모가 됐다.  냄새, 뿌리모양, 잎모양, 그리고 나무가 서 있을 그 주변 어디까지 눈을 감고 상상해본다. 거기에 적당히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세상 모든 일을 무던하게 이겨내는, 나와 안 닮은 아이이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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