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색찬란한 명절:3편 소유주의 이야기

첫번째 명절, 두번째 가족

by 이야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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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찬란한 명절 : 3편 소유주의 이야기

- 첫번째 명절, 두번째 가족


앞가슴을 눌러 동여맨 한복 치마 끈은 점점 더 죄어왔다. 옆에 있는 남편에게 헐겁게 풀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시댁 식구들의 눈치가 보였다. 결혼 전 급하게 뺀 살은 결혼 직후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찌기 시작했다. 남편이 늦게 들어올 때마다 혼자 한잔 두잔 마시던 술이 이런 결과를 불러올 줄은, 물론 알고 있었다.

집에 술 냄새가 날까 봐 옥상 테이블에서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한 일이 어느덧 습관이 되어 버렸다. 집주인이 세입자가 사는 옥탑방 앞에서 술을 마신다는 것이 싫었을 텐데 옥탑방 여자는 말없이 눈감아 주었다. 술 한잔이 절실하던 밤, 그녀가 집을 나서는 것을 보고 옥상에 올라가 첫잔을 따르려던 순간, 그녀의 발이 눈 앞에 나타났다.

"아, 나가시는 줄 알고. 죄송해요."

한동안 날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 지운은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서 옷가지를 챙겨 들고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그날 이후 그녀는 방에서 작업 중일 때 내가 테이블에 앉아 있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고 방해받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비상식적인 행동에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내가 집주인이라서 그런 거겠지, 하고 생각하며 반 남은 소주병 뚜껑을 닫으려는데 그녀가 내 앞에 마주 앉았다.

"저도 한잔 주세요."

그렇게 그날부터 그녀와 나의 대화 없는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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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생각을 하며 멍하니 서있는데,

"질부."

라는 낯선 단어가 툭 치고 들어왔다.

친정과 달리 시댁은 제사를 지낼 때 여자들은 절을 올리지 않고 부엌에 따로 서있도록 했다. 고개를 돌리자 옆에 서있던 큰어머님이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네, 네?"

"애기는 언제 가지려고?"

"아,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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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결혼 직후부터 아이를 갖고 싶어 했다. 단체 미팅에서 만나 3개월 만에 식을 올리면서, 양가 어른들도 재촉하지 않는 임신을 남편은 이상하리만치 조급해했다. 서른 전에 결혼하겠다는 목표, 맞벌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수입이 있는 남자를 만나겠다는 목표를 모두 이룬 난, 결혼 후 얼이 나간 것처럼 지내왔다. 제약 회사 영업팀에 다니면서 잦은 술자리 접대에 힘들어하면서도 남편은 내게 건물 관리를 맡기지 않았다. 가사를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본인이 컨트롤하려고 했다. 그리고 난 남편 몰래 피임약을 먹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남편의 관리 영역 안에서만 움직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결혼 후 첫 명절.

1층 여자는 여행을 떠났고 옥탑방 여자도 시댁이나 제사와는 상관없는 미혼이므로 여유로운 일상을 보내는 듯했다. 난 짧은 연애 탓에 아직은 낯선 시부모님과 더 낯선 시댁 식구들과 정신없는 공간에서 여전히 얼이 나간 채로 서 있다.

"우리 새애기 이리 오너라."

아버님의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우리 가족이 됐는데 인사 올려야지. 우리 유주 곱다, 고와."

아버님은 환히 웃으시며 머뭇거리는 내게 손짓하셨다.

12남매 중 장남이신 아버님. 그 자녀분들까지. 결혼식 때 오셨다고는 하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들 사이로 주춤주춤 걸어가 잔에 술을 받았다. 그리고 절을 올렸다. 바닥에 앉는 순간 가슴을 죄던 끈이 툭 하고 풀어진 듯했다.

난 훅, 하고 크게 숨을 내뱉었다.

그 순간 시댁에서 큰집으로 출발하기 전 급하게 먹었던 떡국이 아래로 내려가는 듯했다. 아니, 편히 숨을 내뱉으니 이 낯선 공간에 온기가 조금은 도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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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 작은방까지 몇개의 상을 펴고 정신없는 대가족의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려고 부엌으로 가자 어머님이 어깨에 손을 올리시더니 가만히 말씀하셨다.

“일할 사람 많아서 안 움직여도 돼. 내내 긴장했을 텐데 방에 들어가서 쉬어.”

“아, 네 어머님.”

제일 막내인 내가 가만히 앉아있을 수는 없었으므로 쟁반을 들고 접시를 옮기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렇지만 어머님의 한마디에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마음이 더 편안해졌다. 남편보다도 시부모님이 더 의지가 되었다. 무뚝뚝하고 말이 없으신 두분이었다. 처음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도 서로 어색해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선산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차에 올라타기 전에 남편이 챙겨준 멀미약 덕분에 다행히 차만 타면 밀려오는 구토 증세는 나타나지 않았다. 선산 앞에 큰 도로가 나서 묘가 있는 곳까지는 경사가 가파른 오르막이었다. 앞서 가던 남편이 손을 잡고 힘껏 끌어올려 주었다.

“아버지, 우리 귀한 딸 왔습니다.”

절을 올리고 나서도 아버님은 해가 질 때까지 한참을 당신의 아버지 앞에 서 계셨다.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첫 명절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차에서 내려 건물을 올려다보니 우리가 사는 3층을 제외하고 반지하부터 옥탑까지는 모두 불이 켜져 있었다. 1층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2층에 사는 선머슴 같은 딸아이는 창문에 얼굴을 내밀고 있다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남편은 내가 처음 만났을 때 호감을 느꼈던 예의 그 코를 찡긋거리는 표정을 하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보름달이 기울었다. 나도 남편의 오른쪽 어깨에 머리를 기울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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