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 윤봉길 의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기리다
"오늘" 생각난 장소에 대한 비정기적 매거진 No.21
며칠 전 상하이 여행 관련 방송을 보다가,
아주 오래전 갔던 휴가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때만해도 여행 당시 사진을꺼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은 삼일절이 아닌가.
거리에 게양되어 있는 태극기를 보니
그때 그 사진들이 생각났다.
4년이란 시간을 동고동락한
친구들과 나는 대학교 졸업 후
8월15일 광복절 즈음에
대한민국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던 상하이로 여행을 갔고,
(사실, 여행지를 상하이로 정한 것이 그 이유는 아니었으나
광복절과 상하이는 매우 깊은 관계가 있는 지역이므로)
그때 루쉰 공원을 찾았다.
홍커우 공원은 1988년 이후 루쉰 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당시 우리의 나이는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졌던
그 나이와 거의 비슷했다.
그 사실을 알고 숙연해졌던 우리들,
그때 우리는 윤봉길 의사가 나라를 위해
적에게 폭탄을 던졌던 이 나이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고 되물었다.
상하이 여행 이후 우리는 대학원으로, 회사로,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 일상의 고민에 파묻혔지만
그때 나눴던 대화만큼은 진심이었다.
여행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의 입장료는 15위안이었다.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은 그때보다 5위안 인상되었다.
2017년, 현재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입장료는
20위안이다.
역사적으로, 식민 지배를 받은 나라 중에서
임시정부를 세우고 독립 의지를 세계 각국에 천명한 나라가
몇개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독립 의지는 강력했다.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수립되었던 이유 중 하나는
당시 이곳이 프랑스의 조계지로 일본의 영향력이 적게 미쳤기 때문이다.
상하이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동방명주일 것이다.
중국의 과거를 보려면 시안을,
중국의 현재를 보려면 북경을,
중국의 미래를 보려면 상해를 가라!
이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상하이는 중국의 고도 성장을 대표하는 도시이자
미래 성장을 견인하는 곳이다.
동방명주는 상해의 월스트리트에 위치한 방송 수신탑으로써
총 높이가 468m에 달한다.
일반 관광객들은 263M 전망대를 이용하게 되어있으므로
우리도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초만에 263M에서 내렸다.
당시 나는 회사 업무 때문에 초고층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초고강도 콘크리트 관련 심포지엄을 다니고 있었는데,
이 심포지엄에는 세계 굴지의
대기업들이 참여하였다.
그만큼 높은 건물에 대한 인간들의 로망은 계속 된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혹시 나중에는 1001층짜리 건물도 나오지 않을까요? 라는
나의 상상에 선배가 한심하듯 쳐다보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1001층은 애초에 말이 안되는 높이야. 인간에게는 한계라는 게 있어, 라고 했다.
혹자는 바벨탑의 교훈을 잊었냐고 하지만,
어쩌겠는가. 저 아찔한 높이의 건물 앞에서는 저절로 탄성이 나오는 것을.)
동방명주를 위시하여, 일제히 야경을 뽐내는
상하이 와이탄 지구의 초고층 건물들을 보면서,
이곳이 바로 말로만 듣던, 모던 시티 혹은 메가폴리스로구나,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외탄, 혹은 와이탄, 영어로는 번드라고도 불리는 곳.
원래 쌀을 실은 짐배를 끄는 길이었다는 와이탄은
지금은 코스모폴리스의 웅장한 면모를 드러내준다.
그런데, 와이탄의 성장 배경에는 상하이의 아픈 역사가 감추어져 있다.
조계(租界)는 1840년 아편전쟁의 패배로 체결된 불평등 조약에 의해 중국 대륙에 있는 각지의 항구에 설치된 조차지를 말한다. 조차지란 외국인이 행정자치권이나 치외법권을 가지고 있는 지역으로, 다른 나라에게 임시적으로 임대된 곳이다. (홍콩은 영국의 조차지였고,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조차지였던 지역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된 서양 열강들은
아시아 각국에 조계 지역을 넓히는 한편,
상하이의 와이탄 일대를 대외 무역의 중심지로 삼았다.
이때, 열강들은 무역 회사나 은행 등을 설립하여 이 지역을 번화가로 조성했고,
그로인해 상하이는 '오리엔탈 월 스트리트리트'라는 이름을 얻으며
금융과 경제의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열강의 침탈이 이루어진 곳이라는 배경을 알고나니,
코스모폴리스 상하이라는 도시가 마냥 화려해보이지만은 않았다.
00의 명동, 이라는 수식어는 상하이에서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남경로, 혹은 남징둥루라는 곳을 설명할 때 어김없이 나오는 단어가 '상하이의 명동'이다.
그런데 이 말이 또 틀린 것이 아닌 것이, 남경로에는 각종 백화점과 상점, 명품숍들이 밀집되어 있다.
우리는 꼬마기차를 타고 남경로를 한바퀴 돌아보았다.
상하이 여행 중, 마지막으로 갔던 곳은 예원이란 곳이다. 명의 관리였던 반윤단(潘允端)이 부모님을 위해
지은 정원으로 이곳에서는 명나라 시대의 향취를 느낄 수 있었다.
코스모폴리스라는 면모 아래 막연하게 무국적 도시라고 인식했던 상하이가
비로소 중국 땅임을 실감했던 곳이기도 하다.
사실, 상하이는 내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여행지였다.
그곳에 다녀온 지도 너무 오래되었고, 정말 가고 싶었던 여행지 또한 아니었기에
친한 친구들과 여름 휴가 때 다녀온 여행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부산진 일신여학교 등
우리나라 경남지역에서
최초로 삼일 운동이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고,
또한 건국절 논란 등을 지켜보며
3.1 독립 만세 운동이, 얼마나 우리 국민에게 의미있었던 운동인지
대한민국 정부 정통성의 뿌리인 상하이 임시정부는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코스모폴리스 상하이는 한때의 번영을 상징하는
과거형의 단어가 아니라
감히 예측할 수도 없는 미래를 지향하는 도시임을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수많은 영화를 보며 느낄 수 있었다.
휴가는 때로는 이렇게 역사의 현장 속으로 나를 데려가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