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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술사 May 10. 2017

[달쓰반] 61편/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

Egon Schiele: Death and the Maiden 2016

가끔은 달콤하고, 때로는 쓰디쓴, 장르 불문, 반전 있는 문화 리뷰 No. 61

※ 주의 :  화가 에곤 쉴레의 생애 및 영화의 주요 내용을 언급합니다.

에곤 쉴레  <죽음과 소녀>


영화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감독/디터 베르너)에는 표현주의 화가인

에곤 쉴레의 그림 <죽음과 소녀>에서 모티프를 따온 장면이 나온다.

표현주의는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을 중심으로 전개된 예술 사조로서,

인간의 내면 세계를 밖으로 표현하는데 초점을 둔다.


어렸을 때는 막연하게 요절한 예술가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그때는 사실 요절이 무슨 뜻인지도 잘 몰랐지만

일찍 죽는 예술가들의 위인전을 계속 읽었다.


피아노 학원에서 연습이 베토벤 방에 배정되면,

모차르트 방으로 바꿔달라고 했다.

 

내 생각에는 오래 산 베토벤보다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모차르트가 더욱 위대한 예술가 같았다.

왜냐면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듣던 천재 예술가들은 모두 빨리 죽는 것 같았고,

그것이 멋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귀가 들리지 않았지만, 교향곡을 작곡했던 베토벤보다

죽음의 그림자를 예견하고,

모차르트가 레퀴엠을 작곡했다는 구절이 내 마음을 끌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요절한 예술가들에 관심을 갖다가

점점 나이가 들면서, 신산한 삶을 살다간 그들을 멀리하고 싶어졌다.


기왕이면 살아 생전 예술가로서 명성도 얻고 부귀 영화도 누리고 살면 좋지 않은가.

왜 예술가라고 꼭 가난해야 하며

뭇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하며

시대의 비극에 휩쓸려 일찍 죽어야 하나?

요절 했기 때문에 천재로 남는 것인가?

천재이기 때문에 요절한 것인가?

등등의 생각은 예술가들의 전기 영화를 한동안 멀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영화  <에곤 실레: 욕망이 그린 그림> 을 보면서

지난날 내가 외면하려고 했던 질문에 다시 한번 맞닥뜨리게 되었다.


에곤 쉴레의 대표작 중 하나인 [죽음과 소녀]는 그의 모델이자 연인이었던 발리 노이칠을

그린 마지막 작품으로,

영화 속에서 <죽음과 소녀>와 같은 구도로 찍힌 장면은 두 사람의 이별을 암시하고 있다.


클림트의 모델이었던 발리는 에곤 쉴레를 만난 후 그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쏟는다.

뮤즈 역할 뿐만 아니라, 그의 조력자 역할까지 도맡아 한다.

에곤 쉴레의 그림을 팔러 다니기도 하고, 그가 감옥에 갇혔을 석방을 돕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 더 안정적인 생활을 하길 원했던 에곤 쉴레는

그녀 대신 이웃집에 사는 중산층 가정의 숙녀 에디트에게 청혼한다.

상처 받은 발리는 에곤 쉴레를 떠나 전선에서 부상병을 돌보다가 성홍열로 사망한다.


에곤 쉴레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구나, 라는 것을

영화 초반 여동생 게르티와의 관계에서 보여주는데

영화의 중반부를 지나 후반부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다.

영화 속에서 에곤 쉴레는 에디트와 결혼 날짜를 잡고도,

발리에게 비밀 혼인 서약을 하고 매년 여행을 떠나자고 말한다.

에디트에게 청혼하기 전에는 그녀의 친 언니인 아델과도 썸을 탔다.


미성년자 성추행 혐의로 법정에 섰을 때,

에곤 쉴레가 소녀를 강제 추행했다는 누명은 벗었지만,

미성년자의 누드를 그려 윤리 기강을 무너뜨렸다는 죄목으로 구금 당한다.

이때 에곤 쉴레는 "화가인 나에게는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외친다.


에곤 쉴레는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였으나

학교의 보수적인 학풍에 반대하다가 퇴학당한 전례가 있다.


에곤 쉴레가 표현의 자유를 외쳤을 때 나는 멈칫했다.

영화 초반에 묘사된 장면들이 계속 나를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누드 모델은 바로 에곤 쉴레의 여동생인 게르티이다.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친 여동생을 누드 모델로 쓴다고?

표현의 자유가 사회적인 관습 혹은 윤리 규범과 충돌할 때 이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가?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내게 예술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생을 사랑한다. 모든 생명의 깊이에 침잠하는 것을 사랑한다.
그러나 나를 원수 다루듯 사슬로 묶어 나 자신의 것이 아닌 삶으로,
즉 하찮은 가치밖에는 지니지 않고 그저 실리적일 뿐인, 예술이 결여돼 있고
신이 부재하는 삶으로 나를 몰아넣고자 하는 강제를 혐오한다.
나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심층으로 가라앉기를 원한다 .
(에곤 쉴레의 옥중 편지)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에곤 쉴레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것,

구스타프 클림트와 교류를 했다는 것,

체코의 체스키 크롬로프에

에곤 쉴레 아트센터(http://www.schieleartcentrum.cz)

있다는 것 정도였다.


영화 속에서도 게르티와 에곤의 관계를 두고,

친 남매처럼 안 보인다는 둥

설왕설래가 있다.


실제로 에곤 쉴레가 여동생 게르티를 누드 모델로 기용해

그린 그림은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올랐고

두 사람이 부모님의 신혼 여행지로 여행을 간 일화는

쉴레 남매를 둘러싼 소문에 불을 붙인 꼴이 되었다.


이 영화의 감독은 게르티가

에곤의 또 다른 모델인 모아 만두를 질투하는 장면을 삽입하여

두 사람의 관계가 보통의 남매 관계 이상이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두 사람의 서로를 향한 애착이

사회 윤리적으로 금기된

성적인 뉘앙스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장면에서는 다소 모호하게 처리된 점도 있긴 하지만)



게르티는 에곤을 화가로서 존중했고,

자신 또한 오빠에게 모델로 인정받길 원했다.

그래서 모아 만두의 이름이 에곤 쉴레의 그림에 새겨졌을 때

더욱 질투를 했던 것이다.

모아 만두는 에곤 쉴레가 유일하게 자신의 그림에

이름을 남긴 모델이라고 한다.



게르티와 에곤은 친구들과 함께 떠난 여행에서 크게 다투고,

게르티는 에곤의 친구인 안톤 페슈카와 함께 밤을 보내게 된다.

안톤과 결혼하겠다는 게르티에게 에곤은 격노한다.


하지만 안톤과 게르티는 결혼식을 올리고

에곤과 안톤은 처남과 매제가 된다.


게르티의 결혼 이후

그의 뮤즈가 되어 준  사람은 바로 발리.

 

하지만 에곤 쉴레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밝혔듯

'유리한' 결혼을 택한다.


그의 이기적인 모습에는 잠시 화가 났지만,

영화는 에곤 쉴레의 도덕성에 흠결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청문회가 아니니까.

그는 자유로운 삶을 사는 동시에 안정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의 '이중적인 욕망'에 충실하려고 했다.

영화는 그의 이런 모습을 두둔하지도, 경멸하지도 않고

그냥 보여준다. 관객들이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판단할 수 있도록.



하지만, 이러한 이중적인 욕망은 충돌을 일으킨다.

그녀의 아내가 된 에디트 하름스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언급하며

정숙한 그림을 그릴 것을 요구한다.


에곤 쉴레의 아내, 에디트 하름스



에디트는 에곤 쉴레와 발리와의 관계를 계속 의심했고, 두 사람은 이때문에 종종 다투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에 큰 관심이 없던 에곤 쉴레였지만

사라예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와 발칸 반도가 세계의 화약고로 변해버린 이상

오스트리아 출신인 그 역시 징집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가 발리를 버리고 에디트를 택한 것도 징집 이후의

안정된 생활을 원했기 때문이다.  결혼한지 삼일 만에 징집된 에곤 쉴레를 따라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삶을 사는 에디트의 심신은 쇠약해졌고,

임신 6개월의 몸으로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한다.

에곤 쉴레도 아내가 죽은지 사흘만에 눈을 감는다.


스페인 독감은  환자의 피부에서 산소가 빠져나가면서 보랏빛으로 변해 죽어가는 병으로

당시 5,0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사자 수보다 3배나 많은 숫자였다.

클림트 또한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하였다.


꽈리가 있는 자화상



에곤 쉴레는 자신의 매력을 알고 있었고, 그것들을 여성들에게 어필하는 법도 알았다.

막장 드라마식으로 표현하자면 '나쁜 남자' 혹은 '야망남', '배신남'이었고

예술가의 자서전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기적인 욕망에 충실한 나르시스트', '자아도취된 에고이스트'

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어떤 남자였든지 간에

에곤 쉴레는 화가로서 인정받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림을 놓지 않았던 예술가였다.

그는 전쟁중에도 전시회를 했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혜안을 가진 열명을 포함한 천명의 학자가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한 명의 천재, 한 명의 발명가, 한 명의 창조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식을 가진 사람은 몇 천 명이나 됩니다.
이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훌륭한 사람과
앞으로 훌륭하게 될 사람들이 있겠지요.

그렇지만 나는 나의 훌륭함이 마음에 듭니다.

(에곤 실레가 페슈카에게 보낸 편지 中)




ps. 그림 출처

http://www.leopoldmuseum.org/de/sprachen/es


http://www.egon-schie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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